2016.02.18 02:14 PM
By 노승현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 동성결혼 합헌 판결 당시 반대표를 던졌던 '보수파의 거두' 앤터닌 스캘리아(Antonin Scalia·79) 연방 대법관이 갑작스럽게 사망해 미국이 술렁이고 있다.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동성애와 동성결혼 문제로 미국 사회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전해진 비보로, 미국 대선 경선이 이제 막 열을 올리고 있는 시점인데다 그의 사망은 사법부의 미래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어서 미국 사회에서는 이번 스캘리아 대법관 사망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아울러 스캘리아 대법관에 이은 후임 대법관에 누가 임명될 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스캘리아 대법관 사망 후 즉각 차기 대법관 임명에 착수했는데, 공화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대법관 임명을 차기 대통령에게 넘겨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진보적 인사를 임명할 경우, 연방대법원의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현재의 5대 4에서 4대 5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스캘리아 대법관은 낙태나 동성애, 동성결혼 등에 반대 목소리를 내온 사법부의 보수파의 거두여서, 그의 사망은 앞으로 미국 사회와 사법부가 더욱더 진보적으로 급선회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번 스캘리아 대법관 급사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워낙 크다 보니, 암살설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 대선 경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도 스캘리아 대법관 암살설이 터무니 없지만은 않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CBS뉴스에 따르면, 트럼프는 16일 미국 라디오 방송 '새비지 네이션'에서 스캘리아 대법관의 암살 가능성을 묻는 말에 "대법관 얼굴 위에 베개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아주 이상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암살설에 대해 더 자세한 발언은 생략했다.
'새비지 네이션'은 미국의 보수적인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새비지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인데, 새비지는 음모론에 있어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앞서 에볼라 사태에 대해서도 에볼라가 국가 전체를 감염시키려는 오바마 정부의 계획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단골 청취자를 보유하고 있다.
새비지는 이날도 트럼프에게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암살설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워런위원회(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조사위원회)에 상응하는 기구를 꾸리고 시신이 처리되기 전에 즉각 부검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캘리아 대법관은 지난 13일 서부 텍사스로 사냥 여행을 떠나 멕시코 국경지대와 멀지 않은 '시볼로 크릭 랜치(Cibolo Creek Ranch)'에서 사냥을 즐긴 후 리조트에서 잠들었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스캘리아 대법관은 전날 밤 친구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으며, 이로 인해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스캘리아 대법관이 머물던 목장의 주인인 존 포인덱스터(John B. Poindexter)가 샌안토니오 지역지와의 인터뷰에서 "숨진 채 누워 있는 대법관의 머리 위에 베개가 있었고 침대 이불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해 암살설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텍사스 주 프레시디오 카운티 법원의 신데렐라 게바라 치안판사는 시신을 보지 않은 채 심근경색에 따른 자연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검조차 지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스캘리아 대법관의 사인에 대한 암살설 음모론이 더 커지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게바라 판사는 수사 당국이 타살 정황이 없다고 한 데다가 스캘리아 대법관의 워싱턴 주치의도 지병이 있었다고 밝혔다면서 의혹을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스캘리아 대법관은 사망 바로 직전에 브라이언 가너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 교수와 함께 12일 간의 여정으로 아시아를 방문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너 교수는 당시 스캘리아 대법관의 상태에 대해 "스캘리아는 홍콩과 싱가포르의 대학교에서 2개의 강연을 하는 등 여행 내내 건강 상태는 양호해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음모론을 확산시킬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는 것이 음모론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로 보인다. 그러나 스캘리아 대법관의 장례식은 20일 치러질 예정이다. 이에 따라 스캘리아 대법관 사망 후에도 음모론은 계속해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스캘리아 대법관의 사망으로 보수 5 대 진보 4로 갈려 있던 연방 대법원의 구성에도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동성결혼 합법화 등을 밀어붙여온 오바마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에 의해 판결이 뒤집히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임기 내에 진보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할 것이 확실시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연방 대법원에 진보 성향 법관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미국의 연방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데다 종신제여서, 한 번 대법관을 임명하면 그로 인한 영향력이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일치하는 대법관을 임명해 자신이 추진해온 여러 정책들이 사법부에 의해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못을 박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에서는 대법관 임명을 대선 이후로 미뤄야 한다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치 맥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국민이 차기 대법관을 결정하는 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며 "공석은 다음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채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의 해리 리드(네바다) 상원 원내대표는 "연방 대법원에 중요한 안건들이 너무 많이 걸려 있다"며 "상원은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빨리 공석을 채워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번에 급사한 스캘리아 대법관은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법관으로 임명돼 30년간 재직해왔다.
첫 이탈리아계 대법관이자 현재 연방 대법관 가운데 가장 오래 재직한 인물로, 헌법 해석에 있어서 '원본주의'를 표방했으며, 줄곧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사형 제도와 총기 보유에 대해서는 옹호한 반면 낙태와 동성애, 동성결혼에 대해서는 반대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정책이었던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에도 반대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