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0 11:19 PM
By 이재경
첫 내각 온건파 중용...'보스' 별명 여동생 막후 실세 역할할 듯
부처 18→9개로...'달러화 도입·중앙은행 폐쇄' 공약 속도 조절
밀레이, '급진적 괴짜'에서 '합리적 보수' 이미지 변모 움직임도
극심한 경제난에 신음하는 아르헨티나에 '극약 처방전'을 내밀며 민심을 사로잡은 하비에르 밀레이(53)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0일(일) 취임한다.
경제위기라는 격랑에 휩싸인 '아르헨티나호'를 오는 2027년까지 이끌도록 국민의 선택을 받은 밀레이 당선인은 당장 연간 130∼140%대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과 40%대 빈곤율 등 무너진 경제 근간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상 과제를 안고 첫걸음을 내딛는다.
1983년 군사정권 종식 이후 사실상 아르헨티나 정치사를 지배한 페론주의(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이념) 집권 세력을 누르고 혜성처럼 등장한 밀레이 당선인은 '35년 뒤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국 건설'의 씨앗을 심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국가 대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 집권 초반 내각은 '온건파'
정권 교체 후 급격한 사회변화를 꾀할 것으로 예상됐던 밀레이 정부는 일단 집권 초반 내각을 온건파로 꾸렸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 내정자다.
우파 마우시리오 마크리 정부(2015∼2019년)에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카푸토 내정자는 밀레이 당선인 핵심 공약 중 하나인 '달러화 도입'에 비판적인 인물이다.
중앙은행 총재 내정자 역시 후보 시절 공언과는 달리 '달러화 도입 선봉장' 에밀리오 오캄포 대신 산티아고 바우실리 전 재무장관을 낙점했다.
카푸토 경제장관 내정자 측근인 바우실리 총재 내정자 역시 마크리 정부 핵심 관료 출신이다.
이 때문에 라나시온과 암비토 등 현지 매체는 '달러화 도입 공약 철회'까지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놨다. 밀레이 당선인은 그러나 "(달러화 도입 철회를) 고려한 적 없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당선 이튿날 공기업 민영화 발표 등 속전속결 공약 이행 움직임을 보였던 밀레이 당선인의 첫 경제라인 인선은 현지에서 대체로 예상 밖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여소야대(與小野大) 지형에서 반대 정파를 끌어들이며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환경을 고려한 결정으로 읽힌다.
중앙은행 폐쇄와 달러화 도입이라는 핵심 공약 이행을 위한 개혁 드라이브를 초반부터 제대로 걸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본선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한 뒤 결선투표 선거운동 과정에 마크리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운 부분도 내각 구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치안장관에도 대선 본선 라이벌이었던 '마크리 측'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치안 장관을 내정한 바 있다.
◇ 친미 노선 속 중국·브라질과도 교류 지속
밀레이 당선인은 선거운동 과정에 중국, 브라질,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 등과의 교역에 비판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선 "공산주의자들과 거래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등 공개적으로 반중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에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 및 이스라엘과의 협력 체계를 더 공고히 다질 것"이라며 미국 중심 외교 정책 구상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밀레이 정부가 중국이나 브라질을 등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교역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자료를 보면 지난해 총교역액 기준 대외 교역국 1·2위는 나란히 브라질과 중국이었다.
브라질의 경우 수출액(126억 6천500만 달러)만 놓고 보면 2위 중국(80억 2억2천만 달러)·3위 미국(66억7천500만 달러)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다만, 밀레이 정부는 지난 8월 승인을 받아둔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입(내년 1월)에 대해 "실제적 이점이 없다"며 철회 의사를 밝혔다.
◇ 정부 부처 18→9개로 대폭 축소
기존 18개 부처를 9개로 줄이는 부처 슬림화는 확정됐다. 애초 8개로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보건부가 살아남았다고 라나시온은 전했다.
사회개발부, 노동사회보장부, 공공사업부, 환경부, 여성인권부 등 진보 정권에서 '힘 있던' 부처들은 줄줄이 폐쇄됐다. 각 기능은 대통령 비서관실로 이관되거나, 다른 부처로 흡수됐다.
외교부, 국방부, 내무부, 경제부, 법무부, 보건부, 치안부 등은 유지된다. 기간시설부와 인적자원부 등은 기존 부처 업무 조정을 거쳐 신설됐다. 여기에 더해 수석장관까지 장관급은 10명 선으로 꾸려졌다.
◇ '보스' 여동생 막후 실세...영부인 역할 맡을 듯
밀레이 정부 출범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주목한 또 다른 이슈는 밀레이 당선인의 여동생, 카리나의 역할이다.
밀레이 당선인이 '보스'라고 부르며 큰 신뢰를 숨기지 않는 카리나는 밀레이 선거 캠프 내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키맨'이었다.
일각에서는 카리나가 정부 부처 요직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고 텔람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실제론 특별한 직책을 맡지는 않아, 오히려 자유로운 운신으로 밀레이 당선인을 가장 곁에서 보좌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밀레이 당선인은 '카리나를 비서실장에 임명하고 싶다'는 의향도 내비쳤으나, 현재 규정상 배우자를 포함한 친족을 대통령실과 부처를 포함한 공직에 들일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라나시온은 보도했다.
이 때문에 당장은 카리나가 밀레이의 연인인 유명 코미디언 파티마 플로레스 대신 영부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밀레이 당선인은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더 나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게 성공이고, 그게 플로레스의 진정한 가치"라며, 플로레스를 방송 등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두는 것으로 교통 정리한 듯한 언급을 했다.
◇ 선동가 이미지 벗고 합리적 보수로 '변화 시그널'
경제학자 출신 비주류였던 밀레이 당선인이 후보 시절 '팬덤'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특유의 '거친 입' 덕분이었다.
그는 기성 정치권을 '카스트'(계급사회)로 형용하며 "이 길을 계속 간다면 50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빈민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거대 여야를 싸잡아 비판했다.
나중에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자국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악마'라고 지칭하거나, 전기톱을 들고 정부지출 감축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은 일국의 유력 대선 후보라고 보긴 어려운 과격한 언행이었다.
자신의 첫 직장(인턴)이기도 한 중앙은행을 "정직한 아르헨티나인들로부터 물건을 훔치는 메커니즘"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욕설 섞인 거친 표현까지 쓰는 그에 대해 지지자들도 비속어를 넣은 구호로 화답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지난 달 19일 대선 결선 승리 이후 대통령 당선인으로서의 밀레이는 무정부주의적 선동가 같던 후보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부각했다.
자신과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장 절연할 것 같던 '이웃 대국'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에게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속해서 공유하고 싶다"며 한층 톤을 낮춘 태도를 보였다.
그런가 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축전에 감사를 표하거나 러시아에 취임식 초청장을 보내는 등 변화의 신호를 숨기지 않았다.
기성 정치권과의 극단적인 차별화 전략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밀레이 당선인의 이 같은 변화 모색은 자신의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정치와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통한 경제위기 극복 시도가 국민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밀레이 정권은 크나큰 시련에 직면하며 아르헨티나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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