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9 07:38 AM

포르쉐, 페라리와 벤츠 사이에서 길을 잃다 - 무역전쟁 속에서 정체성 혼란

By 전재희

911 스포츠카로 상징되는 포르쉐, 미국 내 생산 없이 SUV 브랜드로 전락

독일 자동차 브랜드 포르쉐는 고급 스포츠카와 대량 생산 SUV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전략적 혼란에 빠지며 위기에 직면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4월 한때 큰 폭으로 하락했던 포르쉐 주가는 최근 미중 무역 관세 완화 소식과 함께 반등해, 2023년 기업공개 당시 수준의 밸류에이션을 회복했다. 그러나 시장 반응과는 달리 포르쉐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다.

1964년 첫선을 보인 포르쉐 911은 곡선 지붕과 후방 휀더로 상징되는 전설적인 모델로, 페라리 F40이나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포르쉐 주가는 21% 하락한 반면, 페라리는 8% 상승했다.

그 배경에는 SUV 중심의 판매 구조 변화가 있다. 올해 1분기 포르쉐가 판매한 차량의 61%가 스포츠카가 아닌 SUV였다. 이 같은 흐름은 2002년 카이엔(Cayenne) 출시로 시작돼 2014년 마칸(Macan) 출시로 가속화됐다.

911은 가격이 25만 달러를 넘는 고급 스포츠카로, 페라리 로마나 람보르기니 우라칸과 경쟁한다. 이 시장은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제한해 희소성과 고가 전략을 유지하는 럭셔리 브랜드 전략을 따른다. 중고 모델의 가격 상승은 신차의 매력을 더욱 높이며, 일부 한정판 911은 7자리 수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포르쉐

(포르쉐 로고 )

하지만 문제는 포르쉐가 이러한 전략을 SUV 부문에서는 구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칸은 미국에 수입되어 판매되며, 가격 경쟁이 치열한 SUV 시장에서 현지 생산 없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미국 내 SUV 수요는 여전히 크며, 전체 포르쉐 판매의 29%가 북미에서 이뤄진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는 각각 앨라배마주 투스컬루사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턴버그에 SUV 공장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해 포르쉐는 여전히 전량을 유럽에서 수출한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25%의 외제차 관세에 취약하게 만든다. 911과 같은 고급 스포츠카는 고소득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가격 전가가 가능하지만, 마칸은 그러한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포르쉐가 2030년까지 전기차 비중을 80%로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중국 시장을 의식한 결정이었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2022년 3분기 28,085대를 중국에 출하했던 포르쉐는, 올해 1분기에는 9,471대로 급감했다. 전기 스포츠카 타이칸(Taycan)은 1분기 글로벌 판매량이 4,203대에 불과할 정도로 부진하다.

또한 포르쉐는 구조상 독립성을 갖기 어렵다. 현재 포르쉐는 폭스바겐(VW)이 7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두 기업은 여전히 동일한 CEO를 공유한다. 폭스바겐은 다시 포르쉐·피에히(Piëch) 가문의 투자회사에 의해 지배된다. 이에 따라 포르쉐 SUV는 폭스바겐의 일반 브랜드들과 동일한 플랫폼에서 생산된다.

미국 현지 생산을 추진할 경우, 아우디와의 협업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아우디는 현재 멕시코에서 SUV를 생산 중이다.

반면 페라리는 스텔란티스 최대주주인 아넬리(Agnelli) 가문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완전한 경영 자율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브랜드 전략 차원에서도 중요한 차이다.

일부 월가 분석가들은 포르쉐가 분기별로 13%의 세전 수익률을 유지하는 등, 여전히 견조한 수익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공급망 관리 실패, 중국 전기차 시장의 과소 평가, 과도한 고정비 등 개별적 실책들이 문제였다고 본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포르쉐는 최근 인력 15% 감축 계획과 내연기관 중심으로의 전략 회귀를 선언했다. 그러나 전기 스포츠카 확대와 중국 의존이라는 전략적 선택은 브랜드 희소성과 프리미엄 가치를 희석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프리스(Jefferies)의 필립 우쇼이스는 "포르쉐가 대량 생산 기반의 사고방식을 버릴 수 있을지, 혹은 버려야 할지조차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포르쉐는 현재 약 18배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BMW나 메르세데스-벤츠의 한 자릿수 배수보다 높지만, 페라리의 47배에는 한참 못 미친다. 페라리는 푸로산구에(Purosangue) SUV를 전체 생산량의 20%로 제한하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또한 중고차 시장의 잔존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배터리 교체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철저한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무역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스포츠카 명가이자 대중 SUV 제조사라는 이중 정체성은 포르쉐에게 계속해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