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3 07:56 AM
By 전재희
기후변화로 여름 폭염 지속되자 에어컨 수요 급증
정치권, 설치 확대 두고 '필수냐 사치냐' 논쟁 가열
파리-올여름 유럽 전역을 강타한 이른 폭염이 오랜 '에어컨 회의론'을 녹이고 있다.
동시에, 미국식 전면 냉방 도입 여부를 둘러싼 새로운 정치적 전선이 형성되며 유럽 사회의 기후·복지·에너지 정책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2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6~7월 초, 서유럽을 덮친 기록적 폭염으로 에어컨을 찾는 시민들이 가전 매장으로 몰렸다.
아직 여름 휴가도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 폭염이 들이닥치며 도시 취약성이 드러났고, 프랑스에선 에어컨이 없는 학교 1,000여 곳이 부분 혹은 전면 휴교에 들어갔다.
극우-보수 진영 "에어컨 확대 필수"...좌파·환경진영 "도심 온도 더 높인다"
이에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Marine Le Pen), 영국 보수당, 스페인 보수정당 복스(Vox) 등은 공공기관에 에어컨 설치를 촉구하고 나섰다. 르펜은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당연히 갖춘 냉방 인프라가 유럽엔 부족하다"며, 학교·병원 등 공공기관에 대한 전면적 에어컨 설치를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 에너지부 장관 아녜스 파니에-뤼나셰는 에어컨의 대규모 확산이 기계 배출 열로 인해 도심 열섬 효과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 "위험 계층에 한정된 냉방은 필요하지만, 도시 전역에 깔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사치품" 인식에서 "생존 필수품"으로...에어컨에 대한 인식 전환
기후 변화로 유럽은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빠르게 더워지고 있으며, 지난달은 서유럽 역사상 가장 더운 6월이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극단적 폭염은 유럽이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기후 재난"이라고 경고했다.
그간 유럽에서 에어컨은 '과도한 미국식 소비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 설비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파리 거주 10년 차 애널리스트 소피 베르토는 "이젠 해마다 점점 더 더워지는 것 같다"며, 이번 여름 결국 파리 시내 매장에서 마지막 남은 에어컨을 사들였다고 말했다.
전력 수요 급증...재생에너지 인프라 확보 시급
에어컨 보급 확대는 전력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2050년까지 냉방으로 인한 연간 전력 수요가 약 10%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유럽은 겨울철 난방 수요가 줄며 일부 상쇄되지만, 전기 히트펌프 보급 확대 역시 전력망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태양광·지열 등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프랑스는 대안으로 지열 냉난방 시스템 확산을 추진 중이다. 해당 시스템은 지하수 열을 여름에는 땅속으로 배출하고 겨울엔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일반 에어컨보다 효율이 높고 대기 온도 상승도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 설치 비용이 높고, 100년 이상 된 건물이 많은 유럽 도심에서는 적용이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도 있다.
보르도 인근 포테-카네 와이너리는 최근 이 시스템을 도입해 와인 저장고와 사무실 냉방을 해결했다. 기술 책임자 마티외 베소네는 "우리에겐 와인이 전부다. 식초로 변할 순 없다"며 "냉방을 위한 에너지 소비는 여전히 고민이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말했다.
에어컨 설치 제한 규제도 정치 이슈로 번져..."빈곤 마인드 버려야"
일부 도시의 냉방 관련 규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런던에서는 새 건물에 에어컨 설치 전 '자연 냉각 설계' 여부를 우선 고려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는데, 보수당 의원 앤드류 보위는 이를 두고 "에너지 절약이라는 빈곤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사디크 칸 런던 시장 측은 "에어컨을 금지한 것이 아니다"라며 "신축 건물에 햇빛 차단 셔터, 자연 환기 설계 등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우선 권장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유럽의 정체성과 기후정책 사이에서 '냉방의 정치학' 격화
미국은 이미 수십억 달러를 들여 학교 냉방 현대화에 나섰으며, 병원 대부분도 냉방이 완비돼 있다. 프랑스 보수당은 이달 관련 입법안을 발의하며 "미국은 앞서가고 있고, 우리는 뒤처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에어컨은 유럽 정치에서 단순한 생활 편의 설비를 넘어, 기후정책·복지정책·문화정체성의 교차점에 놓인 상징이 되고 있다. 유럽이 본격적으로 냉방 체제로 전환할지, 아니면 전통적 건축기법과 도시 설계를 고수할지에 따라 앞으로의 정치 지형과 정책 방향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