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8 07:42 AM
By 전재희
차입비용이 선진국 전반에서 급등... 위기 가능성 거론
영국의 장기 차입비용이 수십 년 만의 최고치로 상승.
많은 선진국이 기록적 부채와 증가하는 이자부담에 직면하면서, 영국이 다른 채무국(미국·프랑스 등)에 닥칠 문제를 예고하는 '석탄광의 카나리아'가 될 수 있다는 분석.
단기 위기 가능성은 낮다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재정 긴축·증세의 정치적 난제는 지속.
지난주 영국의 장기 차입비용(국채 수익률) 이 수십 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뛰자,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는 영국이 재정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관측을 일축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7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코노미스트들도 "당장 위기는 아님" 에 동의한다. 그러나 기록적인 부채를 진 채 점점 더 높은 비용으로 차입해야 하는 선진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영국은 미국·프랑스 같은 다른 채무국들에 닥칠 위험을 경고하는 '선행 지표' 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G7 여러 나라에서 잠재적 재정위기 조건이 갖춰지고 있어요. 물론 위기가 임박하거나 불가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 루스 그레고리(캐피털 이코노믹스 영국 부문 부수석 이코노미스트)
작년 노동당 정부는 재정적자 축소와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해 한 세대 만의 최대 증세를 단행했다. 당시에는 일회성으로 포장됐지만, 리브스는 11월 다시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추가 증세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차입비용은 계속 오르고, 성장률은 기대에 못 미치며, 복지지출은 억제가 어려운 탓이다. 이 패턴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지난 20년간 각국 정부는 저금리에 힘입어 부채를 대거 늘렸다. 금리가 오른 지금, 투자자들은 정치권이 지출 억제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회피한다고 본다. 그 결과 정치는 증세의 쳇바퀴에 갇힌다는 지적이다. 프랑스 정부는 지출 삭감과 공휴일 2일 폐지(근로일 확대에 따른 세수 증대) 추진에 반발이 커 이번 주 퇴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IMF 에 따르면 선진국의 부채/명목GDP 비율은 2007년 이후 두 배 수준인 **약 80%**에 달한다. 글로벌 공공부채는 금리상승 영향으로 2030년대 말 100%에 근접할 수 있다.
지난 1년 사이 전 세계 정부의 순이자지급은 11.2% 늘어난 2조7,200억 달러. 완고한 인플레이션이 금리를 높게 유지한 탓이 크다.

영국은 빚이 가장 많지도, 성장이 가장 느린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준비통화(미국 달러)도 없고, 유로존처럼 큰 중앙은행이 뒷받침하는 통화 블록에도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2022년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재원 대책 없는 감세와 대규모 차입을 결합했다가 파운드 급락과 시장 혼란을 자초한 최근의 뼈아픈 전력도 있다.
투자자들은 이제 영국에 프리미엄(가산금리) 을 요구한다. 완고한 인플레이션 등의 영향으로 국채 수익률(차입비용) 이 몇 년 새 가파르게 상승했다. 30년 만기 길트 수익률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며, 부채가 더 많은 프랑스보다도 높아졌다. 영국 10년물 수익률은 G7 중 최고로 미국을 넘어섰다.
"부채나 재정적자가 더 큰 나라들도 있죠. 하지만 차입비용으로 쓰는 돈의 규모를 보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 마크 다우딩(RBC 블루베이자산운용 고정수익 CIO)
내년 영국의 정부 이자지급액은 1,112억 파운드(약 1,500억 달러) 로 예상된다. 국방비의 두 배 수준이다. 영국의 정부부채비율은 현재 GDP 대비 100% 미만이지만, 고령화와 의료·연금 지출 탓에 **2070년대 초 270%**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예산책임국(OBR) 은 내다본다.
이 조합은 영국을 불씨가 쌓인 화약고로 만든다. 국내외 충격이 추가 금리 급등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영란은행(BOE) 이 정부를 구제하지 않을 독립성을 갖고 있어 영국이 팬데믹 후 과다차입의 현실을 가장 먼저 직면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영국은 적어도 문제와 마주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위기가 터질 때까지 미룰 수 있죠."
- 로빈 브룩스(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다만 트러스 사태의 즉각 재현 가능성은 낮다는 견해도 있다. 파운드화는 지난 1년 달러 대비 상승했다. 트러스 시절의 급락이나 1970년대 IMF 구제금융 당시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세가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작년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재정책임을 약속했지만, 올해 복지 지출 증가세를 다소 낮추려던 첫 시도가 자당(與)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노인 연료보조금 삭감안도 철회됐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올가을 리브스가 내놓을 재정안의 난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성장을 짓누르지 않으면서 세수를 늘리는 방법" 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정치적 여지는 넉넉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