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4 07:33 AM
By 전재희
미·일 무역협정 재검토 가능성 시사...보수 강화·방위비 증액 의지로 동맹 재정립 예고
일본이 사상 첫 여성 총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4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자민당(LDP)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64)가 4일 당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사실상 차기 총리로 확정됐다.
강경한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다카이치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 차원의 재정 지출 확대를 주장하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체결된 미·일 무역협정의 재협상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번 당대표 선거는 지난 9월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의 사임 이후 치러졌으며, 다카이치는 결선투표에서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을 누르고 약 54%를 득표해 승리했다.
자민당은 현재 국회에서 절대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다카이치는 연립 파트너 및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이달 말 공식 총리로 선출될 전망이다.
다카이치가 직면한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무역정책으로 흔들린 미·일 동맹 관계 복원이다.
일본은 트럼프 재집권 이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향후 몇 년간 5,500억 달러(약 770조 원)를 미국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일본산 자동차·기계류 등에 부과되는 미국의 수입관세를 기존 27.5%에서 15%로 낮추는 합의를 체결했다.
이는 이전의 저율 관세 체계보다는 불리한 수준으로, 일본 내에서는 '일방적 협정'이라는 비판이 이어져 왔다.
다카이치는 선거 유세 기간 "전임 정부의 합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양국의 국익에 불균형이 생긴다면 재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만약 협정 조항 중 양국 모두의 국익에 해로운 불평등 요소가 나타난다면, 일본은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고 재협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정 내용에는 일본이 특정 미국 내 투자를 거부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향후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 캘리포니아 소재 랜드연구소의 제프리 호눙 박사는 "다카이치가 협정을 다시 열려고 한다면 상당한 긴장이 뒤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카이치는 선거 직후 "협정을 무효화할 생각은 없으며, 일본의 국익에 맞지 않는 투자는 미국과 충분히 논의하겠다"고 입장을 다소 완화했다.
나라(奈良)현 출신의 다카이치는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정치적 스승으로 삼은 인물로, 일본 내에서는 대표적 보수·민족주의 정치인으로 꼽힌다.
외교·안보 정책에서는 친미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의 자주적 국방 역량 강화와 헌법 개정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강한 국가주의 성향을 가진 그녀는, 이념적 친화성이 미·일 관계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다카이치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국방비를 대폭 늘려야 한다"며 긍정적 입장을 밝혔다.
내년에는 주일미군 주둔비 분담을 둘러싼 새로운 5년 협정이 재협상될 예정으로, 다카이치의 방위비 확대 방침은 미국 측의 우려를 완화할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경제 분야에서 다카이치는 '정부 주도형 성장론'을 주장한다.
그녀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빚을 내더라도 성장과 안보를 위해 필요한 기술 분야에는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며 인공지능(AI), 원자력, 첨단 기술 개발 등을 전략 산업으로 지목했다.
이러한 재정확대 정책은 전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추진했던 '아베노믹스(Abenomics)'의 연장선으로 평가된다.
다카이치의 승리는 최근 주요 선진국에서 진행 중인 보수 진영의 부상 흐름과 맞물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재선에 성공하며 "이민 제한과 대규모 수입관세"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에서도 우파 정당들이 지지세를 넓히고 있다.
자민당은 아베 전 총리 암살 이후 이탈했던 보수층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강경 노선을 강화해 왔으며, 이번 다카이치 선출은 그러한 전략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최근 반이민·'일본 우선(Japanese First)'을 내세운 신흥 보수정당 산세이토(参政党)가 급부상하며 자민당의 표를 잠식한 것도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다카이치는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대만의 국제적 지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이어왔다.
또한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해온 것으로 알려져, 이러한 행보가 중국과 한국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양국은 일본의 과거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아 있는 만큼, 다카이치 정부 출범 이후 한·중·일 관계가 다시 냉각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당선 후 다카이치는 "기쁨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말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젊은 시절 록 밴드 드러머로 활동했고,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고베대학에 통학했던 이색적 이력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경제안보담당상 등 여러 각료직을 역임하며 오랜 경력을 쌓았고, 이번 당선으로 일본 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