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3 06:33 AM

영국, 또다시 수십억 파운드 규모 증세 추진... 노동당 정부 2년 만의 대규모 인상

By 전재희

국가부채 확대·시장 불안 방지 위해 총 300억 파운드 증세... 1970년대 이후 최대 규모

영국 노동당 정부가 2년 연속 대규모 증세를 준비하고 있다. 복지 지출 확대와 부채 관리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번에도 국민에게 '세금 인상'이라는 부담을 지우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Rachel Reeves)는 향후 몇 주 안에 약 300억 파운드(미화 약 390억 달러), 즉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1%에 해당하는 세금 인상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는 2024년 5.7%까지 불어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1970년대 중반 이후 최대 규모의 증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수 비중 38%까지 상승... 영국, 미국보다 높고 독일·프랑스보단 낮아

이번 조치로 영국의 조세 부담률은 GDP 대비 약 37~38% 수준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이는 1990년대의 약 30%, 2010년대 초반의 32% 수준과 비교해 크게 오른 수치다. 영국은 이로써 미국(중간 20%대)보다는 높지만 독일과 프랑스보다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증세안 설명을 요구하는 시위대
(증세안 설명을 요구하는 시위대. 블룸버그 )

경제분석기관 캐피털 이코노믹스(Capital Economics)는 "두 차례의 증세를 합치면, 영국의 세금 인상 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큰 수준"이라며 "이미 침체된 경제 성장에 추가적인 제약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리브스 "쉬운 길이 아닌 옳은 길 택할 것"

리브스 재무장관은 BBC 인터뷰에서 "나는 국가를 위해 옳은 일을 할 것"이라며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국가적 이익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금리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 지금,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고 시장 신뢰를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며 "재정 통제가 느슨해질 경우 국채 이자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 전역의 공통 과제... '복지 유지 vs 재정 긴축'

영국의 증세는 유럽 각국이 직면한 공통 과제를 반영한다. 인구 고령화, 국방비 증가, 금리 상승으로 인해 지출 수요는 커지고 있지만, 경기 부진으로 세수는 정체되고 있다.

특히 독일은 근로소득세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평균 임금의 약 50%)에 달하지만, 그 대가로 소비 침체와 성장 둔화를 겪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국방비를 복지로 돌렸던 유럽은 다시 군비 확충과 노후 인프라 복구에 돈을 써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스타머 정부, '인기 하락' 부담에도 증세 강행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작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인플레이션과 생활비 위기로 지지율이 급락했다. 이번 증세가 실질적인 소득세 인상으로 이어질 경우, 선거 당시 "소득세 인상은 없다"고 약속했던 공약이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당내에서는 "공공서비스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어, 스타머 총리는 '세금 인상 vs 복지 지출' 사이에서 정치적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증세, 성장 둔화 부르지만 시장엔 긍정적 신호

경제학자들은 이번 증세가 소비 위축을 불러올 수 있지만, 시장에는 신뢰 회복 신호를 줄 것이라고 평가한다. 기업세 대신 개인소득세 중심의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완화시키고, 장기적으로 금리 인하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리브스가 10월 초 광범위한 소득세 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영국 국채 수익률은 오히려 하락세를 보였다.

"높은 세금이 결국 지출 개혁의 계기 될 수도"

베렌베르크은행의 앤드루 위샤트(Andrew Wishart)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제 정부는 시장의 제약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며 "높은 세금 부담은 결국 '지출 구조조정' 논의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세금 인상이 정치적 부담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 재정을 지속 가능한 궤도로 돌려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의 경고, 그리고 영국의 시험대

전문가들은 영국이 "선진국 재정정책의 '탄광 속 카나리아'(canary in the coal mine)"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부채와 복지의 균형을 맞추려는 실험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먼저 시도되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 성장률이 정체된 유럽에서 이 시험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미국 역시 성장세가 둔화될 경우 비슷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어느 나라도 시장의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영국의 증세 논쟁은, 복지국가의 꿈과 재정 현실이 충돌하는 21세기 선진국 경제의 단면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