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3 07:44 AM

핵 프로그램 고수한 이란, 통화 위기 도화선 되다

By 전재희

이란 정부가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 프로그램을 축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통화 가치 폭락과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복합 위기가 현실화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리알화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고, 물가 급등과 실업난 속에 민심은 빠르게 이반하는 모습이다.

리알화 폭락에 상인·학생 시위 확산

위기의 전조는 지난해 12월 28일 테헤란 바자르 인근 쇼핑몰에서 나타났다. 환율 급등으로 수익을 낼 수 없게 된 상인들이 잇따라 점포 문을 닫았고, 곧이어 취업난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이 가세하며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리알화 약세와 재차 치솟은 인플레이션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임계점으로 몰아가고 있다.

트럼프 "유혈 진압 시 미국 개입" 경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을 통해 시위대 추가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미국이 이란 시민들을 도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체적인 방식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강경한 메시지는 이미 긴장 상태에 놓인 이란 정국을 더욱 자극했다.

'자원 부국' 이란의 역설...정치가 경제를 옥죄다

이란은 석유와 가스가 풍부하고 고학력 인구와 외환보유고를 갖춘 국가다. 그럼에도 통화 위기에 빠진 직접적 원인은 정치에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란 지도부는 값싼 전력 생산을 명분으로 핵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과 동맹국들은 이를 핵무기 개발의 위장으로 의심하며 제재를 강화해왔다.

핵 협상 교착...전쟁 후유증이 결정타

워싱턴과 테헤란 간 우라늄 농축 제한 협상은 성과 없이 표류해 왔고, 지난해 6월 이스라엘과의 12일 전쟁 이후 완전히 중단됐다.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으로 이란의 핵·미사일 시설과 방공망이 큰 타격을 입은 이후, 경제 불안은 급격히 증폭됐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중동·북아프리카 프로그램 국장 사남 바킬은 "핵 합의가 없다면 이란은 더 깊은 경제적 파탄과 반복되는 시위, 개혁 대신 무력에 의존하는 통치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전쟁 이후 리알화 60% 폭락...식료품 물가 64% 급등

전쟁 이후 리알화 가치는 달러 대비 약 60% 하락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이란의 식료품 물가 상승률은 64%로, 남수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시라즈의 한 부동산 중개인은 수입 쌀 한 포대 가격이 일주일 새 15% 올랐고, 추가 인상이 예고됐다고 전했다.

제재의 족쇄...외환보유고 있어도 못 쓴다

문제는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금융·무역 제재로 국제 거래가 막혀 있고, 해외에 묶인 외환보유고도 제재 탓에 사용할 수 없다. 이란 전문 싱크탱크 '보르스 앤드 바자르'의 에스판디야르 바트만겔리지는 "보유고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 리알화에 가해진 압박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조금 축소·은행 파산...민생 충격 가중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외화 보조금 배분을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연료 보조금도 줄였다. 재정 악화로 한 대형 은행은 파산 처리됐다. 수입업자 상당수는 환율 변동 리스크를 견디지 못해 영업을 중단했고, 테헤란 바자르는 며칠째 사실상 폐쇄 상태다.

시위 확산 속 '강경 통치' 기류

정부는 한파를 이유로 대학과 학교를 임시 폐쇄했지만, 시위 확산을 차단하려는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지침 아래 의회·군·사법부는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어 정책 전환 여지는 크지 않다.

이란 반정부 시위 확산
(이란 반정부 시위대. 자료화면)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이란 국민은 경제난의 원인을 외교·핵 정책에서 찾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아직 정권 교체로 이어질 '결정적 균열'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 컨설턴트는 "식탁이 비어갈수록 충성심은 유지되기 어렵다"며 체제의 내구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한, 통화 위기와 사회적 불안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