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6 07:26 AM
By 전재희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이 사망한 뒤, 그와 교류했던 정·재계·학계 인사들은 "범죄의 실체를 몰랐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정부 문서와 이메일은 이와 상반된 정황을 드러낸다. 다수의 유력 인사들이 2008년 유죄 판결 이후에도 엡스타인을 위로하고, 언론 대응을 조언하며, 이미지 회복 전략까지 논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6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2019년 2월, 엡스틴은 '악취 나는 언론 보도(putrid press)'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조언을 구했고, 이에 대해 언어학자이자 정치 활동가인 노엄 촘스키 (Noam Chomsky)는 공개 대응을 피하라고 권했다.
그는 언론을 "공격 기회를 노리는 독수리들"에 비유하며, 여성 학대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 자체를 "히스테리"로 표현했다. 이 교신 이후 수개월 만에 엡스틴은 연방 성매매 혐의로 체포됐다.
영국 정치인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은 2008년 엡스타인에게 "나는 당신을 높이 평가한다"며 조기 석방을 위해 싸우라고 격려했다. 이후 그는 유럽연합(EU) 관련 민감한 정보를 엡스틴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으로 수사 대상에 올랐다.
금융권에서도 유사한 메시지가 이어졌다. 당시 JP모건 프라이빗뱅크 수장이던 제스 스탤리(Jes Staley)는 복역 중인 엡스틴에게 "버텨달라"고 썼고, "그 섬을 유지하길 바란다"는 농담 섞인 말도 보냈다.
2011년, 엡스틴은 영국 왕실 인사인 앤드루 왕자(Prince Andrew)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우려했고, 왕자는 "우리는 함께 이겨내야 한다"고 답했다. 이 무렵 피해자 버지니아 주프레(Virginia Giuffre)는 엡스틴이 자신을 왕자에게 성매매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영국 억만장자 기업가 리처드 브랜슨 (Richard Branson)은 2013년 엡스틴에게 친근한 메시지를 보내며, 빌 게이츠(Bill Gates)를 활용한 이미지 세탁 전략까지 제안했다. 브랜슨 측은 이후 "범죄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트럼프 행정부 백악관 전략가 출신인 스티브 배넌 (Steve Bannon)은 엡스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정교한 작전(op)"으로 규정하며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그는 공개 반격보다는 침묵이 낫다고 조언했고, "구원 불가능한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아동 인신매매범이라는 서사는 막아야 한다"고 썼다.
공개된 이메일들은 엡스틴이 장기간 정치·재계·학계의 막강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범죄 혐의 이후에도 사회적 보호막을 누렸음을 보여준다.
다수 인사들이 피해자보다 엡스틴의 평판 관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이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권력과 면책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는 평가가 나온다.
엡스틴은 2019년 8월 뉴욕 연방 구치소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사인은 자살로 결론 났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인맥과 사후 공개되는 자료들은 지금도 국제 사회에 깊은 파문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