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9 07:03 AM
By 전재희
인공지능(AI) 열풍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한때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으로 평가받던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이제는 세계 주요 석유 기업들을 넘어서는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장기 공급계약 확산을 통해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 한국의 삼성전자(Samsung Electronics), SK하이닉스(SK Hynix) 등 세계 3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의 시가총액은 현재 각각 1조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세 기업의 합산 기업가치는 세계 최대 석유기업 3곳의 시가총액 합계를 약 22% 웃도는 수준이다.
특히 플래시 메모리 업체 샌디스크(Sandisk)의 시가총액은 올해 3월 이후 거의 세 배 가까이 증가하며 아시아 최대 석유 생산기업인 페트로차이나(PetroChina)에 육박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 같은 변화는 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데이터센터와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급증한 결과로 분석된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는 석유처럼 공급과 수요에 따라 가격이 크게 변동하는 대표적인 범용 상품(Commodity)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AI 시장 확대는 이러한 공식을 바꾸고 있다. 대형 AI 모델 학습과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수요가 기존 공급 능력을 크게 초과하면서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메모리 업체들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장기 공급계약 체결을 고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올해 3월 실적 발표에서 최초의 5년 장기 공급계약 체결 사실을 공개했으며, 추가 고객들과도 유사한 계약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샌디스크 역시 차기 회계연도 생산량의 3분의 1 이상을 장기계약으로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구체적인 계약 규모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실적 발표에서 향후 3년 동안 고객 수요가 자사 공급 능력을 크게 초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실적 발표에서 "메모리는 이제 고객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 자산이 됐다"며 "가격 변동성과 공급 불확실성이 기업 운영의 핵심 리스크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AI 인프라 구축 경쟁을 벌이고 있는 빅테크 기업들은 안정적인 공급 확보를 위해 장기계약 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투자은행 UBS는 내년 전체 D램 출하량의 최대 30%가 장기 공급계약으로 판매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구글(Google), 아마존(Amazon) 등 하이퍼스케일러(Hyperscaler) 기업들이 서버용 D램 생산량의 약 3분의 2를 이미 선점한 것으로 추정했다.
UBS의 팀 아르쿠리(Tim Arcuri) 애널리스트는 "대형 기술기업들은 가격 협상보다 안정적인 공급 확보와 미래 투자 계획의 예측 가능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최근 급등한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가 과열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월가에서는 오히려 현재 주가 수준이 실적 대비 저평가 상태라는 분석이 나온다. 장기 공급계약이 확대되면서 과거처럼 경기 변동에 따라 실적이 급격히 흔들릴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의 경우 올해 2월 종료 분기 조정 주당순이익(EPS)이 전년 동기 1.56달러에서 12.20달러로 급증했다. 시장에서는 올해 회계연도 EPS가 60달러를 넘고, 다음 회계연도에는 100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이크론의 주가수익비율(PER)은 향후 예상 실적 기준 10배 미만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보다도 낮은 6~7배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미국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PHLX Semiconductor Index) 구성 종목들의 평균 PER은 약 26배에 달한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석유가 글로벌 경제의 핵심 자원이었다면, AI 시대에는 메모리 반도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AI 모델 규모가 커질수록 고성능 메모리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구조인 만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메모리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투자 경쟁이 지속되는 한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초호황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으며, 장기 공급계약 확대가 과거의 극심한 업황 사이클을 완화시키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