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1 02:16 PM
By 전재희
미국 화이트칼라 직장인 상당수가 승진과 임금 인상 없이 경력 정체 상태에 빠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고용 시장이 겉으로는 비교적 견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수 전문직 종사자들이 경력의 핵심 성장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한 새 연구에 따르면, 미국 전문직 종사자 약 4명 중 1명은 최소 5년 동안 실질적인 임금 상승이나 직급 상승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중간 경력 정체' 현상이다.
해당 연구는 버닝글래스연구소(Burning Glass Institute)와 뉴욕대 전문대학원(NYU School of Professional Studies)이 2000년 이후 130만 명의 중간 경력 전문직 종사자 경로를 추적해 분석한 결과다.
연구진은 이 현상이 특정 업종이나 일부 근로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분석했다. 버닝글래스연구소의 매트 시겔먼(Matt Sigelman) 회장은 "노동력의 4분의 1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는 틈새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문제는 경력 초반의 부진이 이후 장기 소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중간 경력 정체에 빠진 근로자들은 첫 10년 동안 평균 임금 상승률이 30%에 그친 반면, 계속 성장 궤도에 오른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률은 71%에 달했다. 이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 생활과 초기 10년의 경험 축적, 기술 개발이 이후 경력 이동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이번 연구는 최근 미국 고용 시장에 대한 기존 평가를 복잡하게 만든다. 팬데믹 이후 한때 기업들의 채용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연구진은 이 시기에도 중간 경력 정체 현상이 계속됐다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아마존(Amazon), 메타 플랫폼스(Meta Platforms), UPS 등 대기업들이 관리자와 사무직 인력을 포함해 대규모 감원을 단행하면서 승진이나 더 나은 조건의 이직 기회도 줄어들고 있다.
텍사스주 갈런드에서 사무관리자로 일하는 에리카 오버핸즐리(Erika Oberhansley)는 7년째 같은 직무에 머물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던 시기에 임금 인상을 받았지만, 생활비 상승을 따라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나은 급여의 사무직을 찾으려 했지만, 지원 결과는 거절이거나 무응답이었다. 그는 "상황이 끔찍하다"고 토로했다.
오버핸즐리는 현재 인튜이트(Intuit)를 통해 회계 관련 자격 과정을 밟고 있다. 기존에 회사 재무 관리 업무를 맡아온 경험을 공식 자격으로 연결해 회계 전문가나 부기 담당자로 이동하기 위한 시도다.
중간 경력 정체는 업종별로도 차이를 보였다. 연구에 따르면 공공행정 분야에서 정체를 경험한 비율이 30.2%로 가장 높았다. 이어 부동산·임대업 28.9%, 유틸리티 28.0%, 제조업 27.0%, 도매업 26.9%, 금융·보험업 26.6% 순이었다.
반면 정보산업은 20.7%, 헬스케어·사회복지 분야는 21.8%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연구진은 공공행정 분야의 경우 상위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제한돼 있어 정체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는 비학위 자격증이 경력 정체를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긍정적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건강 전문직, 교육, 커뮤니케이션, 심리학, 컴퓨터·IT 지원 분야의 자격은 정체 가능성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공공행정이나 엔지니어링 분야의 일부 자격은 오히려 정체 가능성과 함께 나타났다.
핵심은 단순히 자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역량을 활용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인접 분야로 이동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사무관리자가 비즈니스 운영 직무로 이동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데이터 과학자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43세의 에리히 아일렌버거(Erich Eilenberger)는 한 대학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4년간 맡았지만 의미 있는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후 더 높은 직급이 팀 내에서 열렸고 그는 해당 업무를 수행했지만, 최종적으로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는 2025년 다른 대학의 기금 모금 관련 직무에 지원하면서 기존의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역량뿐 아니라 기부 유치와 관련한 경험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새 직장을 얻었다. 그는 "글쓰기라는 하나의 기술에 머무르는 대신, 내가 하는 일을 확장해 앞서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연구는 미국 노동시장에서 경력 이동성이 장기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다른 분석과도 맞닿아 있다.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은 지난 4월 보고서에서 오늘날 근로자들이 외부 기업으로부터 더 나은 급여의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19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일부 지역에서 소수 고용주에게 일자리가 집중된 것도 원인으로 꼽혔다.
주정부 기관에서 법률 준수와 리서치 업무를 맡고 있는 28세 시디 트라오레(Sidi Traore)는 과거 해고를 경험한 뒤, 9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직장만으로는 부를 쌓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부동산 중개 면허를 취득하고 주말에는 오픈하우스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왜 자신에게 베팅하지 않느냐"며 "고용 안정성은 허상이다. 6자리 연봉을 받는 직업을 가질 수 있지만, 더 이상 자산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오늘이나 내일 해고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직장인들이 경력 정체를 예외적 위기가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경로로 받아들이고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뉴욕대 전문대학원의 앤지 카마스(Angie Kamath) 학장은 산업이 새로운 기술과 조직 구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인접 분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경력 성장과 소득 상승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승진과 임금 인상이 멈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직무에 머무르는 인내가 아니라, 현재 보유한 기술을 어디로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