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3 07:23 AM
By 전재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규제기관의 결정 과정에 전례 없이 깊숙이 개입하면서 미국의 규제 행정 체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과거에는 독립기관의 전문 관료와 위원들이 처리하던 기업 인수·합병 심사, 방송 면허, 식품의약품 승인, 통신 규제 등 주요 사안들이 이제는 백악관과 대통령의 직접 판단 아래 놓이는 양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거래위원회(FTC), 연방통신위원회(FCC), 식품의약국(FDA) 등 주요 규제기관의 결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으며, 기업과 로비스트들도 더 이상 기관 실무진을 설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 접근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 사례는 옴니콤그룹의 130억 달러 규모 인터퍼블릭그룹 인수 심사였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세계 최대 광고회사가 탄생하는 거래였지만, 이 심사는 FTC 내부 절차를 넘어 대통령 집무실까지 올라갔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앤드루 퍼거슨 FTC 위원장과 해당 거래를 논의하던 중, 보수 성향 뉴스채널 뉴스맥스의 크리스 러디 최고경영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게 했다. 러디는 광고 보이콧 피해를 주장하며 합병 승인을 막거나, 피해 보상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퍼거슨 위원장은 러디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합병은 승인됐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가 과거 규제기관의 독립적 심사 관행과는 크게 다른 장면이었다. 이전 행정부들에서는 대통령이 규제 심사 중인 사안에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직접 당사자를 연결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직후 독립 규제기관들이 주요 규정을 백악관 예산관리국에 제출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독립기관이 처음으로 주요 규제안을 백악관 심사 체계 안에 넣는 조치였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FTC를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민주당 성향 위원들을 해임했다. 현재 FTC 5인 위원회는 공화당 위원 2명만 남은 상태다. 독립기관 위원을 대통령이 사유 없이 해임할 수 있는지 여부는 현재 연방대법원에서도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워싱턴의 권력 지형도 바꾸고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기관의 담당자나 고위 관료만을 상대로 로비하지 않는다. 백악관, 나아가 대통령 본인을 직접 설득하는 것이 규제 승인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블룸버그 거버먼트의 연방 로비 신고 분석에 따르면, 2025년 백악관을 대상으로 한 로비 활동 공개 건수는 70% 증가했다.
식품의약품 분야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력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팟캐스터 조 로건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에게 환각제 관련 약물에 대해 문자로 의견을 전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좋다. FDA 승인을 원하는가? 해보자"는 취지로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FDA 수장이었던 마티 마카리는 백악관의 지시를 충분히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임 직전 트럼프 대통령은 전자담배 향료 승인 문제를 두고 담배업계 경영진들과 만났으며, 마카리는 이 사안에서 백악관과 충돌했던 인물로 전해졌다.
담배업계와 제약업계도 트럼프 행정부의 새 규제 환경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레이놀즈 아메리칸 자회사는 트럼프 지지 슈퍼팩에 500만 달러를 기부했고, 필립모리스 인터내셔널 미국 법인 대표도 트럼프 대통령의 버지니아 와이너리에서 열린 고액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FCC의 브렌던 카 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의 규제 행정 변화에서 핵심 인물로 꼽힌다. 카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하게 협의하며 FCC의 주요 결정을 백악관에 사전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디어 비판 기조와 보조를 맞추며 방송사와 미디어 기업을 상대로 강경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파라마운트와 스카이댄스의 합병 심사 과정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CBS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변수로 작용했다.
파라마운트는 결국 트럼프 측과 1,600만 달러 규모로 합의했고, 이 돈은 트럼프의 향후 대통령 도서관과 법률 비용에 쓰인 것으로 전해졌다.
FCC는 또 넥스타미디어그룹의 경쟁사 인수를 승인했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넥스타는 미국 TV 시청 가구의 약 80%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FCC의 기존 39% 한도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그러나 8개 주와 위성방송사 디렉TV가 반독점 문제를 제기하며 소송을 냈고, 연방법원은 지난 4월 해당 합병을 중단시켰다.
FCC는 최근 디즈니의 ABC 방송 면허에 대한 검토에도 착수했다. 이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서 지미 키멀 해고를 요구한 지 하루 만에 나왔다. 카 위원장은 이 검토가 디즈니의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과 관련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디즈니는 FCC가 정치적 발언을 위축시키려 한다고 반발했다.
FCC는 텍사스 민주당 정치인 제임스 탈라리코가 ABC 프로그램 '더 뷰'에 출연한 것과 관련해, 해당 프로그램이 뉴스 프로그램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부자 행사에서 카 위원장을 직접 언급하며 FCC가 뉴스 미디어를 통제하고 책임을 묻는 일을 잘하고 있다고 치켜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일부 공화당 인사들조차 이런 방식이 향후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보수 진영에 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FTC 역시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 성격이 바뀌고 있다. 메타가 FTC와 반독점 소송을 벌이던 당시,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와 측근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에게 사건 취하를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FTC가 메타와 합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퍼거슨 FTC 위원장은 직접 대통령을 설득해 재판을 진행하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메타가 FTC가 요구한 300억 달러 수준의 합의금을 내지 않으려 한다며 사건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타는 결국 지난해 11월 법원에서 승소했다.
전직 FTC 위원들은 현직 FTC 위원장이 대통령에게 반독점 재판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퍼거슨 위원장은 공개적으로 FTC를 "트럼프-밴스 FTC"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전직 공화당 FTC 관계자들은 기관의 독립성과 품위를 훼손하는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이 연방정부를 운영할 민주적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았기 때문에 독립기관 역시 대통령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악관은 "선출되지 않은 관료가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정부를 운영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독립 규제기관의 전문성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영리 윤리감시단체 캠페인 리걸센터의 아다브 노티 대표는 트럼프 행정부가 기관의 전문성을 정치적 목적과 정적 공격에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보도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미국 규제국가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기관별 절차와 전문가 판단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대통령과 백악관의 의중이 기업 합병, 방송 면허, 의약품 승인, 미디어 규제까지 직접 좌우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가 행정 효율성과 민주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조치인지, 아니면 독립기관의 중립성과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권력 집중인지는 앞으로 미국 정치와 사법부에서 계속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