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1 07:40 AM
By 전재희
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3년 가까이 만에 처음으로 인상했다.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해협 폐쇄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커진 데 따른 조치다.
ECB는 11일 기준금리를 기존 2.00%에서 2.25%로 0.25%포인트 올렸다. 시장에서는 이미 예상된 결정이었지만, 이번 인상은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 가운데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해 처음으로 긴축에 나선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호르무즈해협의 장기 폐쇄는 세계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경로를 크게 바꿔놓고 있다. 전쟁 이전만 해도 투자자들은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 중앙은행들이 올해 금리 인하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ECB 역시 2026년에는 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유로존 인플레이션이 다시 3%를 넘어서면서, ECB는 추가 물가 확산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이번 금리 인상의 직접 배경은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해협 폐쇄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로, 이 지역의 통항 차질은 국제유가와 운송비, 에너지 비용을 끌어올리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단순히 휘발유나 난방비에 그치지 않는다. 운송, 포장, 식료품, 비료, 제조업 비용으로 확산될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우려하는 것은 에너지 가격 상승이 일시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임금과 서비스 가격, 일반 상품 가격으로 번지는 상황이다.
ECB의 이번 결정은 그런 2차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 성격이 강하다. 경제학자들은 ECB가 공격적인 긴축 사이클을 시작했다기보다, 물가 기대가 다시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리를 한 차례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ECB와 달리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다음 주 회의에서 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회의는 케빈 워시(Kevin Warsh) 신임 연준 의장이 주재하는 첫 회의다.
워시 의장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저금리 요구와 인플레이션 재상승 압력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은 AI 투자 붐과 에너지 수출 증가로 유럽보다 경제 충격을 덜 받고 있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력은 여전히 부담이다.
영란은행(BOE)도 다음 주 회의에서 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ECB는 유로존의 정책금리가 미국보다 낮고, 전쟁 전 기준금리가 경제를 자극하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중립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리 인상 여지가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
누빈(Nuveen)의 글로벌 투자전략가 로라 쿠퍼(Laura Cooper)는 "주요 중앙은행 가운데 ECB는 금리 인상 사이클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며 "정책금리가 이미 중립 수준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럽 경제는 중동 전쟁의 여파를 미국보다 더 크게 받고 있다. 미국은 AI 투자 확대와 에너지 수출 증가라는 완충 요인이 있지만, 유럽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성장세도 약하다.
ECB는 이번 결정과 함께 성장률 전망도 낮췄다. ECB는 유로존 경제가 2026년 0.8%, 2027년 1.2%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금리 인상이 쉽지 않은 환경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 둔화가 더 깊어질 수 있다. 반대로 금리 인상을 미루면 에너지 가격 상승이 경제 전반의 인플레이션으로 번질 수 있다.
중동 전쟁이 언제 끝날지 불확실하다는 점도 중앙은행들의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전쟁이 짧게 끝나면 에너지 가격 충격도 제한적일 수 있지만, 호르무즈해협 폐쇄가 장기화되면 물가와 성장 모두에 더 큰 압박이 될 수 있다.
ECB가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였지만, 개발도상국 중앙은행들은 이미 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방어를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물가 상승과 환율 압박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했다.
호주와 노르웨이 중앙은행도 5월 금리를 올렸고, 일본은행(BOJ) 역시 다음 주 금리 인상이 예상된다. 이는 이란 전쟁과 에너지 가격 충격이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통화정책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6년 초까지만 해도 세계 중앙은행들의 관심은 인플레이션 둔화와 금리 인하 시점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 급등 이후 통화정책의 초점은 다시 인플레이션 억제로 이동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ECB의 이번 금리 인상을 2022년 인플레이션 대응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보고 있다. 당시 주요 중앙은행들은 물가 상승을 일시적이라고 판단해 대응이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됐고, 이후 급격한 금리 인상이 필요했다.
T.로프라이스(T. Rowe Price)의 토마시 비엘라데크(Tomasz Wieladek) 유럽 거시전략 책임자는 ECB가 가계와 기업에 "2022년 같은 인플레이션 재발은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ECB의 최신 전망에 따르면 유로존 인플레이션은 올해 약 3% 수준을 기록한 뒤 2028년에야 목표치인 2%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ECB가 단기 에너지 충격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번 인플레이션 충격이 2022년과 똑같이 전개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본다. 당시에는 팬데믹 이후 경제 재개에 따른 강한 수요, 정부 부양책,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천연가스 가격 폭등이 동시에 작용했다.
현재 유럽 경제는 그때보다 훨씬 약하다. 수요가 강하게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가 오르면, 기업과 소비자가 비용을 모두 흡수하기 어렵다. 이는 인플레이션의 확산을 제한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성장 둔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유로존 경제는 올해 1분기 0.2% 위축됐다. 다만 이 수치는 미국 다국적기업의 유럽 거점 역할을 하는 아일랜드 경제의 급격한 조정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기업활동 조사에서도 연료 가격 상승이 상품과 서비스 수요를 압박하면서 경기 둔화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ECB가 금리 인상에 먼저 나섰지만, 앞으로 계속 금리를 올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경제성장이 거의 정체된 상황에서 추가 긴축은 부담이 크다.
비엘라데크는 ECB의 관심이 머지않아 인플레이션에서 성장 둔화로 옮겨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는 "경제성장이 거의 0에 가까운 환경에서 계속 금리를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인상은 장기적 긴축 사이클의 시작이라기보다, 에너지 가격 충격이 물가 기대를 흔드는 것을 막기 위한 제한적 대응으로 해석된다.
ECB의 금리 인상은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해협 폐쇄가 세계 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꿔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중앙은행들의 주요 과제는 높은 금리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였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이 다시 뛰면서 이제는 인플레이션을 방치할 것인지, 경기 둔화를 감수하고 다시 긴축할 것인지가 쟁점이 됐다.
유럽은 성장세가 약하지만 에너지 충격에 취약하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강한 성장 동력을 갖고 있지만, 인플레이션 재상승과 정치적 금리 압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개발도상국들은 물가뿐 아니라 통화가치 방어까지 고려해야 한다.
ECB가 먼저 금리를 올린 것은 이런 새 환경의 출발점이다. 호르무즈해협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다른 중앙은행들도 금리 인하 계획을 늦추거나 추가 인상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