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4 08:05 AM

돈 쓰기를 두려워하는 유럽인들...소비 위축이 경제 발목 잡아

By 전재희

최근 인플레이션이 미국보다 유럽 소비자들에게 더 큰 심리적 충격 남겨

체코에서 재료공학자로 일하는 마테이 마차크(Matěj Macák)는 최근 자신에게 돈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을 쓰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24세인 마차크는 한때 수집을 즐겼던 운동화를 더 이상 사지 않는다. 휴대전화 충전기처럼 소액의 물건을 살 때도 고민한다.

그는 보통 소득의 절반 이상을 저축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돈을 모으고 있지만, 이제는 자신이 지나치게 절약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마차크는 "조던 운동화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너무 비싼 것 같아 차라리 그 돈을 저축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돈이 적었을 때보다 지금 물건을 더 적게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유럽의 소비 위축
(유럽인들의 소비 위축. WSJ)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3일 최근 수년 동안 유럽인들은 절약을 한층 강화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이미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유럽 경제에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지출을 꺼리는 현상은 유럽 경제가 미국에 뒤처진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다. 미국에서는 특히 고소득층의 견조한 소비가 경제성장을 이끌어 왔다.

고급 핸드백과 시계, 의류 등 세계적으로 선호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유럽 기업들도 이제 성장의 상당 부분을 미국과 아시아 소비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신용카드 한도를 모두 사용하는 데 상대적으로 거리낌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절약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검소함과 겸손을 강조하는 오랜 사회규범, 전쟁 시기의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억은 저축을 하나의 집착이자 도덕적 의무로 만들었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에서는 '빚'을 뜻하는 단어가 '죄책감'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는다.

전 세계 소비자들이 물가 상승에 따른 충격을 경험하고 있지만,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유럽인들에게 미국인들보다 더 큰 심리적 영향을 남겼다.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은 지 3년 이상 지났지만, 유럽 소비자들은 여전히 저축을 늘리고 지출은 주로 필수품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자(Visa)의 거래 자료 분석 결과다.

이란 전쟁으로 다시 촉발된 인플레이션은 유럽 소비자들의 침체된 심리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물가 조정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이후 가계소비는 유로존에서 5.5%, 영국에서 2%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가계소비는 18% 늘었다.

네덜란드 은행 ING의 마리커 블롬(Marieke Blom)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유럽 사이에 나타난 성장률 격차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유럽인들이 평균적으로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유로존의 실질 가처분소득은 현재 코로나19 대유행 이전보다 8% 증가했다.

블롬에 따르면 유로존 가계의 저축률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은 1.3% 증가할 수 있다.

블롬은 "유럽이 국내 수요를 확대한다면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현재의 소비 부진은 경제에 매우 큰 제동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세금 감면과 같은 정책은 소비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럽 정부는 높은 국가부채와 국방비 투자, 고령화로 인해 재정적 제약을 받고 있다.

유로존 가계는 지난해 가처분소득의 약 15%를 저축했다. 팬데믹 이전의 약 12.5%보다 높은 수준이다.

영국의 가계저축률은 팬데믹 이전보다 거의 두 배로 높아졌다. 반면 미국의 저축률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

런던 남서부의 부유한 지역에 거주하는 셸리 페레라(Shelly Perera)는 과거 극장 공연과 고급 중국 음식점에서의 데이트, 남편 및 두 자녀와 함께하는 케냐 등 해외여행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페레라 부부의 급여는 최근 몇 년 동안 상승했다.

그러나 그는 2022년 인플레이션 급등 이후 린트(Lindt) 초콜릿이나 외식에 돈을 쓰기 어려워졌다.

그는 저가형 식료품점으로 옮겼고 유명 브랜드 대신 자체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저축액도 크게 늘렸다.

페레라는 "우리는 꽤 좋은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지출을 크게 줄였다"며 "비용을 낼 형편은 되지만 이제는 그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유럽인 일부는 고령화로 복지제도의 부담이 커지면서 앞으로 정부 연금이 자신들의 노후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파리에서 전략 컨설턴트로 일하는 32세의 빈센트 부카르(Vincent Boucard)는 "약 1년 반 전 유럽인으로서 국가가 제공하는 연금에만 의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세대의 미래는 이전 세대가 경험한 것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카르는 몇 년 전부터 엑셀 파일로 모든 지출을 기록하며 예산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했고 월급의 약 50%를 저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에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유럽인은 여전히 투자에 회의적이다.

유럽 가계는 금융자산의 약 3분의 1을 현금이나 은행계좌에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자산에는 낮은 이자가 적용되며 수익률이 인플레이션보다 뒤처질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유럽인들도 미국인처럼 금융시장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지적한다.

가계 은행계좌에 보관된 수조유로 가운데 일부를 생산성이 더 높은 투자처로 이동시키면 유럽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프랑크푸르트 외곽에서 활동하는 금융심리학자이자 코치인 모니카 뮐러(Monika Müller)는 거래자와 금융자문가들이 위험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세미나를 진행한다.

뮐러는 "우리에게 주식시장은 일상의 일부가 아니었다"며 "우리의 뇌는 주식투자가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가족의 돈과 관련된 역사를 적게 한다.

한 번은 한 고객이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투자하는 데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손 인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해당 고객은 결국 투자를 결정했다.

뮐러는 독일인들이 돈을 안전과 동일시하며, 돈을 내놓는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돈에 안정과 안전의 의미를 투영하지만 미국에서는 돈에 자유를 투영한다"며 "불안정성을 완전히 피하려 한다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유럽인에게 저축의 필요성은 20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과 경제적 파괴를 경험한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전해진 교훈이다.

네덜란드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피터 브라켄호프(Pieter Brakenhoff)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어난 아버지가 옷이 완전히 해질 때에만 새 옷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그의 가족이 누린 가장 큰 사치는 과거 네덜란드에도 매장이 있었던 미국 체인 음식점 애플비(Applebee's)에 가는 것이었다.

브라켄호프는 10대 시절 신문배달로 번 돈을 이용해 나이키 운동화를 한 켤레 구입했다.

그는 "운동화는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신발 한 켤레에 그렇게 많은 돈을 썼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크게 다퉜다"며 "아버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브라켄호프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보냈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좀 더 여유 있는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전보다 더 자주 식당에 가고 여행도 떠나고 있다.

브라켄호프는 "나는 돈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