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6 11:30 PM
By 전재희
베네수엘라에서 100여 년 만에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면서 델시 로드리게스(Delcy Rodríguez) 임시 대통령이 집권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시험에 직면했다.
규모 7.2와 7.5의 강진이 24일 저녁 잇따라 발생한 뒤 구조와 복구에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정부의 피해 예측 모델은 최종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설 가능성도 제시했다. 전체 피해 규모가 확인되기까지는 수주가 걸릴 수 있다.
로이터는 로드리게스 정부의 구조·구호 대응과 재건사업 성과가 그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지진으로 건물과 도로, 공공 기반시설이 광범위하게 파괴됐다.
잔해에 갇힌 주민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주택과 교통망, 전력·상하수도 시설을 복구하는 데 대규모 자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네수엘라는 장기간의 경제위기와 공공서비스 약화로 재난에 대응할 자체 역량이 제한된 상태다.
카라카스에서 활동하는 정치학자 토니 프란지에 마와드(Tony Frangie Mawad)는 로드리게스가 내세워온 '새로운 베네수엘라'라는 정치적 구호가 국가 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베네수엘라가 이제 정치적 의미를 넘어 실제로 파괴된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역설적이라고 평가했다.
프란지는 정부가 국제사회의 지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복구계획을 제대로 추진할 경우 이번 재난을 국민통합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구조와 구호, 재건 과정에서 성과를 낸다면 분열된 정부조직을 장악하고 로드리게스의 지도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지진 직후 "단결을 통해 이 상황을 극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구조와 복구를 정부와 국민이 함께 수행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원 배분이나 구조작업에서 혼선과 부패, 행정 실패가 발생하면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
로드리게스는 자신을 정치적 변화와 개혁을 이끌 지도자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월 축출된 사회주의 정권의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 전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미국은 지난 1월 마두로를 권좌에서 제거했고, 이후 로드리게스가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현재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과거 마두로 정부의 핵심 인사였다는 점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과도정부 지도자라는 점은 이번 재난 대응 과정에서 정치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마코 루비오(Marco Rubio)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의 베네수엘라 지진 지원이 "크고, 빠르며, 효과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은 구조와 복구 속도를 높이고 로드리게스 정부의 대응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
동시에 베네수엘라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과 과도정부의 대미 의존도를 높일 가능성도 있다.
카라카스 소재 컨설팅회사 포데르 이 에스트라테히아(Poder & Estrategia)의 리카르도 리오스(Ricardo Ríos)는 이번 재난을 계기로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로드리게스가 미국을 주요 동맹국으로 더욱 의지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과거에도 대형 자연재해가 국가의 정치적 방향과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는 대규모 산사태로 최소 1만 명이 숨졌다.
당시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
이는 이후 차베스 정부가 반미 노선을 강화하고 베네수엘라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초기 신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됐다.
이번에는 로드리게스 정부가 미국과 협력해 국제 원조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와 다른 대응을 보이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대형 지진과 정부의 부실 대응이 정권의 정치적 몰락을 앞당긴 사례가 있다.
1972년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를 강타한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약 5,000명에서 1만 명이 숨졌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정부의 구호물자 횡령과 부패한 대응은 정권에 대한 반발을 키웠다.
소모사 정권은 이후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축출됐다.
1985년 멕시코시티 지진에서는 최소 5,000명이 숨지고 약 1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정부의 구조·구호 실패는 멕시코 제도혁명당(PRI)의 장기 일당지배 체제가 약화되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됐다.
로드리게스는 과도정부의 수반이기 때문에 향후 구조와 재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의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질 가능성이 크다.
피해지역에 구조인력과 중장비가 늦게 도착하거나 구호물자 배분에서 불공정 문제가 발생하면 주민들의 불만이 정부를 향할 수 있다.
정부기관 간 조율 부족과 부패, 치안 악화도 위험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피해 규모가 예상보다 커지고 복구가 장기화할 경우 로드리게스가 내세운 변화와 안정의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다.
반대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피해지역을 신속히 복구한다면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워싱턴 소재 컨설팅회사 맥라티 어소시에이츠(McLarty Associates)의 중남미 전문가 폴 앤절로(Paul Angelo)는 베네수엘라의 비상대응 능력이 지난 10~15년 동안의 경제혼란으로 약화됐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는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초인플레이션, 공공투자 감소를 겪었다.
약 800만 명의 국민이 경제난과 정치불안을 피해 해외로 떠나면서 기술인력과 의료진, 공공기관 인력도 크게 줄었다.
병원과 소방·구조기관, 전력과 통신망 등 필수 공공서비스는 오랫동안 자금과 장비 부족을 겪어왔다.
이 같은 상황은 대규모 재난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앤절로는 베네수엘라가 약 2,4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자체 재원만으로 대규모 재건사업을 수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대규모 국제지원과 통합된 재건계획, 충분한 자금 투입이 없으면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사회가 제공하는 원조와 차관의 규모와 조건도 베네수엘라의 향후 경제·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재건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과 국제금융기관에 의존할 경우 경제정책과 제도개혁을 요구받을 가능성도 있다.
로드리게스는 마두로 축출 이후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지만 정부와 군, 집권세력 내부의 모든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규모 국가재난 대응은 중앙정부가 군과 경찰, 지방정부, 공기업과 구호기관을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로드리게스가 구조와 재건을 직접 지휘하면서 정부 내 경쟁세력을 통제하고 자신의 권한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반면 각 기관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거나 구호물자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면 정부 내부의 분열이 더 뚜렷해질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들어오는 구호자금과 물품을 어떻게 관리할지도 중요한 과제다.
베네수엘라는 과거 정부 부패와 공공자금 유용 문제로 국내외의 비판을 받아왔다.
구호물자가 실제 피해자에게 전달되지 않거나 정치적 지지 여부에 따라 배분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과도정부의 신뢰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
정부가 국제기구와 협력해 지원금과 물자의 흐름을 공개하고 독립적인 감시를 허용할 경우 신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로드리게스 정부는 마두로 정권 이후 베네수엘라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번 지진은 그 주장이 실제 행정능력과 국가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대규모 시험이 될 전망이다.
재건사업이 성공하면 로드리게스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지도자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복구가 지연되고 피해 주민들의 불만이 커진다면 과거 정권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수주간 진행될 생존자 구조와 구호물자 배분, 피해 집계는 물론 장기적인 주택·기반시설 재건 과정이 로드리게스 정부의 향방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