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7 08:27 AM

'국방 분야의 세계은행' 추진...동맹국들, 무기 생산 금융 지원 나선다

By 전재희

캐나다·룩셈부르크·튀르키예·우크라이나 등 참여...방산업체 대출 보증과 직접 금융 제공 구상

러시아와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 분야에 특화된 새로운 다자개발은행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캐나다와 룩셈부르크,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등 9개국은 7일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례 정상회의에서 '국방·안보·회복력 은행(Defense, Security and Resilience Bank·DSRB)' 출범 계획을 발표했다.

나토기
(나토 깃발)

DSRB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의 재건을 지원하고, 냉전 종식 이후 유럽부흥개발은행이 동유럽의 경제 전환을 도왔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방과 안보 분야의 투자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참여국들은 정부의 신용을 바탕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뒤 무기 생산업체와 부품 공급업체, 주요 안보 인프라에 장기 금융을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국방비는 늘었지만 생산업체는 자금난

NATO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군사력 확대에 대응해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 정부가 국방비를 확대하고 있음에도 무기 생산업체, 특히 중소 부품업체들은 생산시설 확충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형 방산업체는 정부와 장기 계약을 체결하거나 금융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할 수 있지만, 부품과 전자장비, 원자재 등을 공급하는 중소업체들은 은행 대출이나 투자 유치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군수품 생산 확대를 위해서는 공장과 생산라인을 먼저 건설해야 하지만, 정부의 무기 구매 예산은 매년 변동될 수 있어 민간 금융기관들이 장기 대출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각국이 국방비 지출 목표를 높였지만, 실제 자금이 생산시설과 공급망 확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 국제금융기관은 국방 투자 회피

DSRB 설립을 추진하는 국가들은 기존 다자개발은행이 국방 분야에 대한 금융 지원을 사실상 외면해왔다고 주장한다.

세계은행과 유럽의 주요 개발금융기관들은 오랫동안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반발을 이유로 무기산업을 금융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일부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은 무기산업을 담배나 성인산업과 함께 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에 맞지 않는 투자 대상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준은 유럽에서 특히 강하게 적용돼 많은 은행과 보험사, 연기금이 방산기업에 대한 대출과 투자를 제한해왔다.

JP모건체이스와 씨티그룹 등 일부 대형 은행이 최근 방위산업 대출을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금융기관은 평판과 규제 위험을 이유로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씨티그룹 공공부문 국방금융 책임자인 게오르기 요르다노프는 NATO와 동맹국의 국방을 지원하는 것을 회사의 전략적 우선순위로 삼았다고 밝혔다.

국가 신용 활용해 'AAA급' 자금 조달

DSRB는 참여국 정부가 출자한 자본을 기반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 구조로 설계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동으로 자본을 출자하고 각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활용해 최고 수준인 'AAA' 신용등급을 확보한 뒤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이다.

DSRB는 조달한 자금을 이용해 방산업체에 대출하는 상업은행에 보증을 제공하거나,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사업에 직접 장기대출을 제공하게 된다.

이는 세계은행이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회원국의 출자금을 바탕으로 국제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높은 신용등급을 확보하면 개별 방산업체나 정부가 직접 돈을 빌릴 때보다 낮은 이자로 장기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

캐나다 카니 총리가 설립 주도

DSRB 설립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인물은 마크 카니(Mark Carney) 캐나다 총리다.

영국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카니 총리는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사이에서 캐나다와 유럽, 다른 중견국들이 협력해 경제·안보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카니 총리는 올해 봄 DSRB 설립 협상을 주최했으며, 국제 금융 중심지인 룩셈부르크도 은행 헌장 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2018년 DSRB 구상을 처음 제안한 롭 머리(Rob Murray) 전 NATO 혁신 책임자는 현재의 문제는 단순히 국방비를 더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약속을 실제 공장과 생산라인, 군사력으로 전환할 금융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분한 무기 공급과 생산능력 자체가 적국의 군사행동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금융 역시 억지력의 일부가 됐다고 강조했다.

무기 구매부터 탄약공장·사이버안보까지 지원

DSRB의 금융 지원 대상은 무기 구매와 방산공장 건설에 한정되지 않을 전망이다.

추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은행은 탄약 생산시설 건설과 사이버안보 체계 강화, 군사 및 민간 겸용 공급망 구축 등을 지원할 수 있다.

국가안보에 중요한 항만과 통신망, 에너지시설 등 핵심 인프라를 중국 등 위험성이 커졌다고 평가되는 국가의 투자자로부터 되사오는 사업도 지원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민간과 군사 분야에 모두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도 주요 기능으로 거론된다.

이들 기업은 일반 제조업체로 분류되면서도 군사 분야와 연결돼 있다는 이유로 민간 금융기관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DSRB는 정부의 보증을 통해 이러한 기업이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장기 공급계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독일·미국 등 주요 군사국은 창립 단계 불참

미국과 독일 등 대규모 국방예산을 보유한 주요 국가들도 DSRB 설립 논의를 지켜보고 있지만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은행 설립 이후 운영 구조와 성과가 확인되면 이들 국가가 추가로 참여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카니 총리는 현재 참여국만으로도 은행 설립에 필요한 임계 규모에 도달했다며, 다른 국가들이 가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DSRB 창립국에 대형 군사강국이 많지 않다는 점은 은행 설립 취지와도 관련돼 있다.

자체 국방예산과 금융시장 규모가 작은 중견국이나 소규모 국가들은 미국과 독일처럼 정부예산만으로 방산업체를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동 금융기관의 필요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 방산 투자·공동구매 확대

DSRB와 별도로 유럽 각국도 방위산업 금융과 공동구매를 확대하고 있다.

핀란드와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는 6일 국방 투자와 무기 공동구매 협력을 가속화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연합도 탄약 생산과 방산시설 확충을 지원하기 위해 관련 기금을 확대하고 있으며, NATO도 회원국 간 공동구매와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DSRB 지지자들은 기존의 유럽연합과 NATO 프로그램만으로는 방산 공급망 전반의 금융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기존 제도는 정부의 단기 예산이나 특정 무기 구매사업에 집중돼 있으며, 민간 금융기관이 장기적으로 방산 공급망에 자금을 제공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전쟁 전용 은행" 비판도

DSRB 설립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반대론자들은 국제 금융기관이 무기 생산과 군비 확대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면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각국의 군비경쟁을 가속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유럽과 NATO가 이미 공동구매와 방산 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별도의 은행을 만드는 것은 조직과 비용만 늘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부 국방 전문가들도 정부의 국방비 지출이 최근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은행이 반드시 필요한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반면 찬성론자들은 현재의 군비 증강 계획에 비해 생산능력 확대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며, 기존 금융제도로는 공급망 병목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반박한다.

NATO 최고 군사고문을 지낸 롭 바우어(Rob Bauer) 전 네덜란드 해군 제독은 기존의 대출 제약에서 벗어난 DSRB 같은 금융기관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형 방산업체도 장기 금융 혜택 가능

DSRB의 주요 지원 대상은 중소 방산업체와 부품 공급망이지만, 대형 방산기업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방산기업들은 정부의 국방예산과 무기 구매계획이 매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장기 생산시설 투자에 높은 위험을 부담한다.

정부 계약이 취소되거나 예산이 삭감될 가능성은 기업의 대출 비용을 높이고, 금융기관이 더 높은 이자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만든다.

DSRB가 높은 신용등급을 바탕으로 장기 대출이나 보증을 제공하면 기업은 정부예산의 단기 변동과 관계없이 생산라인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다.

동맹국들은 이를 통해 무기 생산량을 안정적으로 확대하고, 러시아와 중국에 장기간 대응할 수 있는 방산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DSRB가 계획대로 출범하면 국방 분야에 특화된 첫 다자개발은행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은행의 실제 규모와 회원국, 대출 기준은 앞으로 추가 협상을 통해 결정될 예정이지만, 각국의 국방비 증액이 단순한 예산 발표를 넘어 생산시설과 군사력 확충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성공 여부를 가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