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8 08:18 AM
By 이재경
캘리포니아주가 추진 중인 억만장자 증세안이 전국적으로 뜨거운 미디어 관심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이를 "미국 기업 정신에 대한 좌파 해안(Left Coast)의 어리석은 공격"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11월 주민투표 안건은 진보 성향 노동조합과 민주당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LA타임스가 8일 보도했다. 이 두 집단은 법안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세력들이다.
캘리포니아 최대 의료노조가 주도하는 주민발의 40호(Proposition 40)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약 200명의 억만장자에게 일회성 5% 세금을 부과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서명한 법률로 삭감된 메디케이드(Medicaid) 재원을 보충하고, 약 1,000억 달러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법안의 설계자이자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 산하 연합의료노동자서부지부(SEIU-UHW·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United Healthcare Workers West) 회장 데이브 리건(Dave Regan)은 이 세금안이 "트럼프의 '하나의 위대한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에 따른 예산 삭감으로 인한 캘리포니아 의료 시스템의 임박한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리건 회장은 주민발의안을 주 의회 의원들 및 의료 업계와의 협상에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해온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 가을 법안이 발표됐을 당시, 그는 경제적 부담, 의료 접근성, 반트럼프 정서를 타고 대중의 불안을 결집할 태세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재 이 법안은 과세 대상 억만장자들의 막강하고 자금력 있는 반대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부유층 증세를 지지해온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교원협회(CTA·California Teachers Association)와 캘리포니아 건설노조위원회(State Building and Construction Trades Council of California)는 40호 법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팀스터스 캘리포니아(Teamsters California)와 AFSCME 캘리포니아는 지지 의사를 밝혔다. 캘리포니아 노동조합연맹(California Federation of Labor Unions)과 리건 노조의 상위 조직인 SEIU 캘리포니아 등 일부 노조는 아직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다.
민주당 주류 세력도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개빈 뉴섬(Gavin Newsom) 주지사는 법안에 강하게 반대하며, 지난해부터 리건과 협상해 법안을 투표에서 철회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6월 말 주민발의안 철회 마감 시한 며칠 전, 리건은 부유세 세율을 2년에 걸쳐 2%로 낮추겠다는 수정안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으나, 뉴섬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일부 가까운 관계자들은 이 제안이 리건이 값비싼 투표 싸움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정치 컨설턴트 스티브 마비글리오(Steven Maviglio)는 "그는 보통 그런 식으로 협상하는 타입이 아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라며 "뜨거운 감자가 됐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건의 노조는 이 세금안을 주민투표에 올리기 위한 160만 명 서명 수집에 3,100만 달러를 지출했다.
퍼퍼다인대·USC·UC버클리 정치커뮤니케이션학 교수 댄 슈너(Dan Schnur)는 "처음에는 그가 과거에 성공적으로 써온 전략의 재연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구석에 몰리고 말았고, 지금은 통과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인도 알고 있는 법안을 떠안게 됐다"고 평가했다.
UC버클리 정부연구소(Institute of Governmental Studies)가 3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등록 유권자의 52%가 억만장자세를 지지하고, 33%가 반대, 15%가 미결정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선거 전문가들은 반대 진영의 막대한 자금력을 감안할 때 이 법안의 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지적한다.
구글(Google)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을 비롯한 여러 억만장자들은 지금까지 총 1억 1,800만 달러를 한 선거위원회에 쏟아부었다. 이 위원회는 억만장자세를 무력화하기 위한 두 개의 별도 법안을 투표에 올리기에 충분한 서명을 확보했다.
의료 재원 확충을 지지할 법한 단체들도 40호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플랜드 패런트후드 제휴(Planned Parenthood Affiliates of California)와 캘리포니아 의사협회(California Medical Assn.)가 대표적이다.
캘리포니아 의사협회, 캘리포니아 1차 의료협회(California Primary Care Association), 캘리포니아 교육위원회협회(California School Boards Association) 대표들은 공동 성명을 통해 "이 위험한 부유세는 캘리포니아의 세수 변동성을 더욱 심화시켜 교육과 학교, 의료 및 진료소, 공공 안전, 사회 기반시설 사업에 대한 핵심 재원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고 밝혔다.
리건과 지지자들은 이 세금안이 승인되지 않으면 트럼프의 '하나의 위대한 법안'이 주의 의료 자원을 황폐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리건은 "이 법안으로 우리 의료 시스템에서 매년 200억~250억 달러가 빠져나가게 된다. 350만 명이 보험을 잃고, 15만 명의 의료 종사자가 해고되며, 이미 2,000만 명 이상의 소비자들이 보험료, 공제액, 본인 부담금을 더 많이 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의원(무소속·버몬트)과 로 카나(Ro Khanna) 하원의원(민주당·캘리포니아 프리몬트) 등 저명한 진보 인사들이 이 법안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일부 진보 반대론자들은 법안이 거의 의료 분야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을 문제로 꼽는다. 세수의 극히 일부만이 교육과 식량 안보에 배분될 예정이다.
CTA는 법안을 검토한 결과 대의원 협의회가 "이 정책이 우리 학교와 지역 사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지속 가능하고 장기적인 재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주 최대 교원 노조 지도부는 특정 고소득층에 대한 기존 세금을 항구화해 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 재원을 마련하는 주민발의 3호(Proposition 3) 통과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노동조합들은 그간 올해 3호의 이전 임시 버전이나 2020년의 상업용 부동산세 개편 실패 제안 등 증세 주민투표안에 공동으로 지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마비글리오는 이번 억만장자세가 "모든 이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 주로 의료 부문 종사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라며 "그게 바로 모두가 동참하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밀물이 오면 모든 배가 뜬다'는 식의 제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리건은 SEIU-UHW를 이끈 지난 15년간 값비싼 주민발의안 — 혹은 그 위협 — 을 주 의회 의원들과 업계 반대 세력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수단으로 활용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2023년의 역사적인 합의에서 그는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도시의 의료 산업 임금 인상 법안을 발의한 뒤 주 전역 의료 노동자 최저 시급 25달러를 이끌어냈다. 이 합의에는 10년간 최저 임금 관련 주민발의를 금지하는 유예 조항도 포함됐다. 또 그는 세 차례 연속 선거 주기에 걸쳐 신장 투석 클리닉 규제 법안을 추진했다. 단 하나도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투석 업계는 2018년부터 2022년 사이에 이를 막기 위해 수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주민발의안 전략가이자 투석 클리닉 법안 싸움 등 여러 투표전에서 리건과 맞서왔던 브랜든 카스티요(Brandon Castillo)는 "리건이 주민발의안을 자신의 노조 조직화 또는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안다. 비밀도 아니다. 본인도 인정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법안은 올해 1월 1일 기준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억만장자들에게 소급 적용된다. 뉴섬 주지사와 반대론자들은 이 법안이 초부유층을 주 밖으로 이탈시켜 주 재정에 구멍을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캘리포니아 재정은 부유층이 주식시장 이익에 내는 소득세에 크게 의존한다. 주 의회 분석국(Legislative Analyst's Office)은 이 법안이 "매년 수억 달러 이상의 주 소득세 세수를 지속적으로 감소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뉴섬 주지사는 6월 말 서브스택(Substack)에 올린 글에서 "일반인이라면 세금을 피해 텍사스나 플로리다로 이사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억만장자들은 할 수 있고 실제로 한다"며 "부는 이동 가능하고, 세금이 가장 낮은 주를 찾아간다"고 적었다.
결국 협상이 합의로 이어지지 않자, 뉴섬은 대신 연방 차원의 부유세 도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슈너 교수는 "뉴섬으로서는 단순히 관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법안의 어느 쪽을 지지해도 민주당 주지사에게는 큰 잠재적 손실이 따른다. 반대하면 지지 기반을 소외시키고, 찬성하면 주를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방 차원의 증세 논의에 집중하면 뉴섬은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정치 의제를 내세울 수 있고, 대선 출마 시 선거 운동 소재로도 활용할 수 있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의 법안 반대 입장은 전국 민주당 경선에서 진보 세력의 비판에 취약한 빌미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