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0 07:28 AM

영국 새 총리 앤디 번햄, '큰 정부'로 경제 위기 돌파 시도

By 전재희

스타머 사임 후 노동당 새 지도자로 취임...시장, 증세·차입 확대 가능성 주시

앤디 번햄(Andy Burnham)이 영국의 새 총리로 취임하며 "더 강한 국가"를 앞세운 경제·정치 개혁을 예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번햄 총리는 20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취임 연설을 하고, 영국이 다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전 총리가 사임한 뒤 노동당 새 지도자로 선출돼 총리직을 넘겨받았다.

번햄은 최근 10년 동안 영국의 일곱 번째 총리다. 그는 "영국이 전례 없는 속도로 지도자를 바꾸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우리 세대 정치인들이 수준을 높이고 새로운 도전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40년 신자유주의 되돌리겠다"

번햄 총리는 취임 첫날부터 국가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다.

그는 지난 40년간 이어진 신자유주의 정책을 되돌리고, 보다 개입적인 정부가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런던에 집중된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고, "삶의 필수 요소"를 국가 통제 아래 두겠다고 밝혔다.

앤디 번햄(Andy Burnham)
(앤디 번햄(Andy Burnham). 위키 )

그의 첫 정책 과제는 거리 노숙 문제 해결이다. 번햄 총리는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상황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또 올해 안에 영국의 향후 10년 계획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 계획이 "새로운 정치 모델과 새로운 경제 모델"을 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타머, 지지율 급락 속 사임

번햄 총리는 이날 오전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에게 사임을 제출한 스타머 전 총리를 공식적으로 대체했다.

스타머는 202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집권했지만, 불과 2년 만에 노동당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당내 의원들의 지지를 잃었다. 현재 노동당은 반이민 성향의 리폼 UK(Reform UK)에 여론조사에서 뒤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당 의원들은 새로운 지도자가 분열된 좌파 유권자들을 다시 결집시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영국의 다음 총선은 늦어도 2029년까지 치러져야 한다.

번햄은 지난주 다른 경쟁 후보가 나서지 않으면서 노동당 대표로 확정됐다.

투자자들, 증세와 차입 확대 가능성 우려

번햄 정부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금융시장을 안심시키는 일이다.

투자자들은 번햄의 경제 정책이 영국을 더 왼쪽으로 이동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 지출을 늘리고, 이를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상과 추가 차입으로 조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러나 번햄의 정책 운신 폭은 제한적이다. 영국의 세 부담과 정부 차입은 이미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에 가까워져 있다. 경제 성장률 전망도 밝지 않다. 영국 경제는 올해 약 1% 성장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번햄은 이날 오후 새 내각 인선을 순차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이 인선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지를 보여주는 첫 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무장관 인선에 시장 관심

시장에서는 번햄 총리가 에드 밀리밴드(Ed Miliband)를 재무장관에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다.

밀리밴드는 번햄의 가까운 동맹으로, 영국의 재생에너지 정책을 주도해왔다. 그러나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재무장관이 될 경우 정부 지출 확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번햄은 이번 주 중 여러 정책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는 의무 신분증 도입 계획 폐기와 가계 지원을 위한 재정 지원 확대 등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북해 석유·가스 시추가 첫 시험대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쟁점은 북해 석유·가스 시추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주말 동안 번햄이 북해 석유 시추를 허용하면 영국을 "가난에 찌든 재앙"에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조만간 스코틀랜드 연안의 잭도(Jackdaw) 가스전과 로즈뱅크(Rosebank) 유전 시추를 승인할지 결정해야 한다. 두 사업은 과거 면허가 승인됐지만, 기후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이 제동을 걸면서 시추가 중단된 상태다.

노동당은 북해의 신규 석유·가스전 탐사 면허 발급을 금지한 바 있다. 따라서 번햄 정부가 기존 노동당 기후정책을 유지할지, 에너지 안보와 투자 유치를 이유로 일부 완화할지가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노동계급 출신 아웃사이더" 이미지 부각

번햄은 자신을 잉글랜드 북부 출신의 노동계급 아웃사이더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런던 중심의 기존 정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보수당과 노동당이라는 영국의 양대 기성 정당은 낮은 경제 성장, 기록적인 이민 증가, 생활비 위기 속에서 유권자 이탈을 겪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전통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번햄은 이 같은 불만을 흡수해 노동당을 재건하려 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장 경험이 정치적 자산

번햄은 리버풀 인근에서 태어났고, 케임브리지대 졸업 후 1990년대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노동당 정부에서 일했다.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노동당 대표 경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2017년 웨스트민스터 정치를 떠나 맨체스터 시장이 됐다.

그는 9년 동안 맨체스터 시장으로 일하며 영국 제2의 도시를 이끌었다. 맨체스터는 탈산업화의 상처를 딛고 적극적인 지방정부 정책과 민간 투자 유입을 통해 회복세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경험은 번햄이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겠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스타머 축출까지 빠르게 전개

스타머 전 총리가 여론조사에서 고전하는 동안 번햄은 변화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해왔다.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당내 불만은 빠르게 커졌다. 이후 번햄은 지방 의회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하며 의회로 복귀했고, 스타머에게 정식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스타머는 당내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뒤 사임을 선택했다.

번햄은 취임 연설에서 원고 없이 "솔직히 말하고 싶다"며 "우리는 충분히 잘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큰 정부' 실험의 성패가 관건

번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어려운 균형을 요구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좌파 성향 노동당 의원들과 지지층이 더 강한 국가 개입, 공공서비스 확대, 부유층 증세를 요구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금융시장과 투자자들이 재정 건전성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은 낮고, 세금 부담과 정부 차입은 이미 높은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번햄이 더 큰 정부와 시장 신뢰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지가 새 정부의 최대 과제가 될 전망이다.

번햄은 영국 정치의 불안정과 경제 침체를 끝내기 위해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이 영국을 안정으로 이끌지, 아니면 재정 부담과 시장 불안을 키울지는 앞으로 발표될 내각 인선과 10년 계획, 그리고 첫 예산안에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