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5 08:59 PM
By 이재경
미국 핵융합 스타트업 퍼시픽 퓨전(Pacific Fusion)이 지난 25일(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새로운 실증 시설의 기공식을 열었다고 IT전문매체인 테크크런치(TechCrunch)가 보도했다. 이 시설은 소비하는 에너지만큼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됐으며, 이를 통해 핵융합 상용화의 핵심 관문으로 꼽히는 '순시설이득(net facility gain)'에 도전한다.
순시설이득은 핵융합 반응 자체가 만들어낸 에너지가 시설 전체를 가동하는 데 들어간 에너지를 웃도는 상태를 뜻한다. 지금까지 어떤 실험이나 장비도 이 기준을 충족한 적이 없다. 미국 국가점화시설(National Ignition Facility·NIF)의 장비가 통제된 핵융합 반응에서 투입한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뽑아낸 사례가 있지만, 시설 전체를 가동할 만큼의 에너지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퍼시픽 퓨전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캐리 폰 뮌치(Carrie von Muench)는 테크크런치에 "상용 핵융합 발전을 향한 거대한 진전"이라며 "우리가 알기로 미국 내에서 이런 종류의 시설이 건설되고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회사는 2030년까지 순시설이득 달성을 목표로 잡았고, 2030년대 중반에는 상용 발전소를 가동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다만 상용 규모 원자로는 발전소 운영에 필요한 부속 장비들까지 가동해야 하는 만큼, 이번 실증 시스템보다 약 5배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앨버커키에 들어서는 이번 시설은 퍼시픽 퓨전이 채택한 핵융합 방식을 시험하는 무대다. 이 방식은 강력하고 정밀하게 동기화된 전기 펄스를 이용해 지우개 크기만 한 연료 표적 주변에 자기장을 만들고, 이를 압착해 연료 원자들이 융합되도록 유도하는 원리다.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인 키스 르시앵(Keith LeChien)에 따르면, 이번 실증 시설은 하루에 몇 차례의 '샷(shot)'을 발사할 수 있는 수준이며, 완전한 규모의 상용 발전소가 되려면 초당 1회의 샷을 소화해야 한다.
전기 펄스는 156개의 펄서 모듈(pulser module)에서 생성된다. 각 모듈에는 32개의 원형 스테이지가 있고, 스테이지마다 10개의 '브릭(brick)'이 들어간다. 브릭 하나는 전력을 저장하는 축전기 2개와 이를 방출하는 스위치 1개로 구성된다. 퍼시픽 퓨전은 올해 초 3분의 1 규모의 펄서 모듈을 시험해 80나노초 동안 440기가와트의 피크 출력을 냈으며, 이 결과가 이번 실증 시설 건설의 청신호가 됐다.
새 시설은 순시설이득 실증뿐 아니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고수율 핵융합 실험도 함께 수행할 예정이다. 미국 정부는 NIF처럼 유사한 연구를 수행하는 다른 시설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지만, NIF는 노후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르시앵은 이번 실증 시스템의 펄스 한 번이 약 100메가줄의 에너지를 낼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NIF 출력의 약 10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시설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중국도 이런 종류의 시설을 짓고 있는데, 우리가 가장 먼저 완성해내겠다"고 말했다.
퍼시픽 퓨전은 2023년 설립돼 이 분야에서 비교적 늦게 출발한 업체지만 최근 몇 년간 빠른 속도로 움직여 왔다. 자금력 면에서도 손꼽히는 핵융합 스타트업으로, 마일스톤 기반의 시리즈A 투자 라운드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폰 뮌치는 규모가 크고 조건이 까다로운 이번 투자 라운드 덕분에 회사가 몇 년마다 다시 자금을 모을 필요 없이 훨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설계한 방식으로 자본 구조를 짜지 않았다면 이 속도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퍼시픽 퓨전은 앞으로도 상용 발전소 실현 경쟁에서 모든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처지다.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Commonwealth Fusion Systems), 헬리온 에너지(Helion Energy), 프록시마 퓨전(Proxima Fusion), 이너시아 엔터프라이즈(Inertia Enterprises) 등 자금력을 갖춘 경쟁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역시 2030년대 중반 또는 그 이전에 핵융합 발전소를 전력망에 연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