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7 11:04 AM

이란산 원유 4000만 배럴, 美 봉쇄망 피해 말레이시아 인근 해상서 대기

By 이재경

미국 해군이 페르시아만 입구에서 봉쇄 작전을 펴고 있는 사이, 싱가포르 동쪽 말레이시아 인근 해상에서는 약 4000만 배럴에 달하는 이란산 원유가 유조선에 실린 채 대기하고 있다고 미국 폭스뉴스(Fox News)가 26일(수) 보도했다.

이는 대형 원유 운반선(VLCC) 약 20척 분량에 해당하는 규모로, 미국의 봉쇄가 이란의 신규 원유 수출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미 봉쇄망 밖으로 빠져나간 이 원유는 테헤란이 현금화할 수 있는 잠재적 통로로 남아 있다는 게 매체의 설명이다. 로이터통신이 인용한 잠정 켑플러(Kpler)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량은 이달 들어 하루 약 53만4000배럴로 줄었는데, 이는 지난 7월 하루 약 82만3000배럴에서 크게 감소한 수치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란은 부유식 저장고에 약 8000만 배럴의 원유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약 절반이 말레이시아 인근 해상 선박에 실려 있다.

이 같은 유동 재고는 군사 행동과 해상 봉쇄에서 나아가 이른바 '최종 국면(endgame)'이라 부르는 대(對)이란 금융 압박으로 전환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에 시험대가 되고 있다. 스콧 베선트(Scott Bessent) 미 재무장관은 지난 24일 '경제적 배척 작전(Operation Economic Outcast)'을 공식 발표하며, 수개월간 이란의 원유 판매·해운망·금융 조력자들을 압박해 온 데 이어 남아 있는 수입원까지 차단하는 "누출 제로(zero-leakage) 방식"을 약속했다.

말라카 해협
(말라카 해협)

폭스뉴스 비즈니스 특파원 로렌 시모네티(Lauren Simonetti)는 이란의 원유 저장 탱크가 77% 채워져 있고, 46척의 이란 유조선이 미국의 봉쇄망에 갇혀 있다는 데이터를 제시하며, 이란이 제재를 피하기 위해 해상에서 선박 간 원유를 옮기는 '선박 대 선박 환적(ship-to-ship transfer)' 전술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방식은 원유의 원산지를 감추는 데 도움이 되며, 최종적으로는 대개 중국의 독립계 정유사가 매수자가 된다.

다만 원유가 봉쇄선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테헤란이 곧바로 현금을 손에 넣는 것은 아니다. 이란은 여전히 원유를 실제로 인도하고 대금을 수취한 뒤, 제재를 피하기 위해 활용해 온 금융 채널을 통해 자금을 옮겨야 한다. 재무부에 따르면 이란은 원유 판매 대금을 주로 중국 위안화로 결산하며, 환전소와 유령회사들이 이 자금을 이란 정권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통화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무부는 과거에도 이란산 원유 판매 대금이 이란 정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무기 개발, 테헤란의 역내 대리세력과 연결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재무부 출신으로 제재 정책을 담당했던 맥스 메이즐리시(Max Meizlish) 민주주의수호재단(Foundation for Defense of Democracies) 수석연구원은 폭스뉴스 디지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시행·집행되는 방식의 봉쇄는 이미 봉쇄선을 넘어간 이란산 원유의 흐름을 실질적으로 막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말레이시아 인근 항로를 이미 표적으로 삼은 적이 있다. 지난 4월 재무부는 홍콩 선적 유조선 '린(Lynn)'호를 제재했는데, 이 선박이 말레이시아 인근 해상에서 이란산 원유를 선박 간 환적한 뒤 중국으로 화물을 인도했다는 이유였다.

메이즐리시 연구원은 행정부가 이란의 제재 회피를 돕는 것으로 지목된 중국·홍콩 무역회사와 해운 서비스 업체 등을 계속 제재해 왔지만, 아직 중국 금융기관을 정식으로 제재 대상에 올리지는 않았다고 짚었다. 그는 미국이 2012년 이란과의 거래를 이유로 한 중국 은행의 미국 금융망 접근을 차단했지만, 재무부의 특별제재대상(SDN) 명단에는 정식으로 올리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이 은행을 정식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면 모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에 압박을 가할 수 있고, 이란 원유 수익 이동에 쓰이는 통로를 교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베선트 장관이 중국을 이름으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며, 이 문제가 향후 미·중 간 고위급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메이즐리시 연구원은 또 다른 대안으로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해역에서 활동하는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유조선에 대한 압박을 확대해 해당 원유가 최종적으로 중국 매수자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은 말레이시아 해역처럼 불법 선박 간 환적의 거대한 거점에서 활동하는 그림자 선단 유조선들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봉쇄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이란산 원유 구매량 급감이 압박 작전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신호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림자 선단 유조선에 이미 실려 있는 원유는 여전히 테헤란의 향후 수입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다"며 "이 정권이 결국 붕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한, 지금 시장에 나와 있는 이 원유를 그림자 선단 유조선에서 저지하는 데 상당한 압박을 쏟아야 한다. 이 돈이 결국 언젠가 정권의 주머니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인근의 이란산 원유 화물과 그림자 선단 선박에 대한 추가 조치 계획이 있는지에 대한 질의에 미 국방부(War Department) 관계자는 폭스뉴스 디지털에 미군이 불법 네트워크를 교란하고 이란을 지원하는 제재 대상 선박을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디서 활동하든" 나포하기 위한 "전 지구적 해상 단속(global maritime enforcement)"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무부 대변인도 "경제적 배척 작전 하에서, 이란 정권과 계속 거래하려는 자는 누구든 더 이상 국제 금융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테헤란에 남아 있는 모든 경제적 생명줄을 끊어내겠다"고 말했다.

메이즐리시 연구원은 이미 그림자 선단 유조선에 실려 있는 원유에서 나온 자금이 결국 테헤란의 손에 들어가 분쟁 과정에서 손상된 군사력 재건에 쓰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이런 선박들을 단속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 해군이 호르무즈 해협 등지에서의 작전으로 이미 여력이 부족한 상태이며, 선박과 화물을 나포할 경우 소유권·관할권, 이후 원유 처리 방식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뒤따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회가 정부의 불법 화물 나포를 더 쉽게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해군만으로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면 그림자 선단 선박을 추적할 역량을 확대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선트 장관의 새 작전은 원유뿐 아니라 디지털 자산, 기술, 금, 항공, 해운 분야까지 겨냥하고 있으며, 그는 테헤란과 계속 거래하는 기관들에 대한 광범위한 2차 제재도 위협했다.

중국의 구매량 감소는 이란이 신규 원유를 시장에 내놓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수천만 배럴의 원유가 봉쇄선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테헤란이 이 원유를 여전히 팔 수 있는지, 그리고 워싱턴이 말레이시아 인근 해상까지 단속을 확대할 의지가 있는지가 '누출 제로'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