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6 07:08 AM
By 전재희
지난해 하원 294대134로 통과했지만 상원 토론종결 표결서 좌초민주당, 트럼프 일가 암호화폐 이해충돌 규정 강화 요구...공화당 의원들도 일부 이탈
SEC·CFTC로 나눠진 디지털자산 규제체계 정비 차질...비트코인·코인베이스 등 급락
미국 암호화폐 산업의 규제 틀을 전면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추진돼 온 디지털자산 시장 명확성법(Digital Asset Market Clarity Act·CLARITY Act)이 상원의 핵심 절차 표결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의회 통과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미 상원은 15일(화) 클래러티법(H.R.3633)의 본격적인 심의를 시작하기 위한 토론종결(cloture) 표결을 실시했으나 찬성 49표, 반대 50표로 부결했다. 상원에서 해당 절차를 통과하려면 전체 100석 가운데 60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번 표결은 법안 자체에 대한 최종 통과 표결은 아니지만, 법안을 본회의에서 계속 심의하기 위한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클래러티법은 지난해 7월17일 하원에서는 294대134라는 비교적 큰 표차로 통과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 216명이 전원 찬성했고 민주당에서도 78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상원으로 넘어간 법안은 약 1년에 걸친 협상을 거쳐 올해 5월 상원 은행위원회를 15대9로 통과했지만, 결국 본회의 단계에서 필요한 60표를 확보하지 못했다.
클래러티법은 미국에서 암호화폐와 디지털자산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감독할 것인지를 법률로 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현재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사이에 나뉘어 있는 디지털자산 감독 권한을 보다 명확하게 정리하고, 디지털자산 거래·발행 사업자에 대한 등록과 소비자 보호, 불법 금융 및 시장조작 방지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최종 협상안에는 탈중앙화금융(DeFi), 소프트웨어 개발자 보호, 자금세탁 방지, 이해충돌 및 계열사 거래 등에 관한 규정도 포함됐다.
지난해 의회를 통과해 법제화된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인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에 초점을 맞췄다면, 클래러티법은 미국 디지털자산 시장 전체의 구조를 규정하는 보다 광범위한 법안이라는 점에서 암호화폐 업계가 가장 중요하게 추진해 온 입법 가운데 하나였다.
쟁점으로 떠오른 트럼프 일가 암호화폐 사업
법안이 막판에 좌초한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과 가족의 암호화폐 사업을 둘러싼 이해충돌 문제였다.
민주당 의원들은 암호화폐 산업을 규율하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면서 현직 대통령과 가족이 동시에 해당 산업에서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는 상황에 대한 보다 강력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A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신고한 암호화폐 관련 사업 수입이 14억달러를 넘었으며, 여기에는 아들들이 공동 설립한 월드리버티파이낸셜(World Liberty Financial) 관련 수입과 트럼프 이름을 이용한 밈코인 사업 등이 포함됐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들들이 운영하는 가족 사업의 의사결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공화당은 표결 직전까지 민주당의 요구를 반영해 법안을 수정했다. 최종안에는 연방 선출직 공직자와 배우자 등에 대한 디지털자산 관련 제한을 강화하고, 일정한 경우 주 법무장관들이 관련 규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 등이 추가됐다. 법안을 주도한 신시아 루미스(Cynthia Lummis) 상원의원 측은 최종안에 민주당이 요청한 126개의 실질적인 수정사항이 반영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민주당은 수정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가 일정 규모 이상의 암호화폐 자산을 보유할 경우 이를 처분하거나 블라인드 트러스트에 맡기도록 하는 규정과 집행 장치가 더 강화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상원 은행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의원과 마크 워너(Mark Warner) 의원 등은 디지털자산 시장에 대한 규제법 마련 필요성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현직 대통령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충분히 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안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애리조나주의 루벤 가예고(Ruben Gallego) 의원도 공화당 측과 막판까지 윤리조항을 협상했지만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공화당에서도 이탈...틸리스는 재표결 길 열기 위해 반대표
공화당은 현재 상원에서 53석을 보유하고 있어 법안을 추진하려면 최소 7명의 민주당 또는 민주당계 의원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날 민주당 의원들은 전원 찬성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공화당에서도 수전 콜린스(Susan Collins·메인), 조시 홀리(Josh Hawley·미주리), 제리 모런(Jerry Moran·캔자스)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톰 틸리스(Thom Tillis·노스캐롤라이나) 의원도 최종적으로 반대표를 기록했다. 미 상원의 공식 투표 결과에서도 이들 4명의 공화당 의원이 모두 'Nay'로 기록돼 있다.
다만 틸리스 의원의 경우 법안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터와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그는 당초 찬성했다가 표결이 실패하는 것이 확실해지자, 상원 절차상 향후 법안의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표를 반대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실제 공식 집계는 49대50이 됐다.
은행권도 '스테이블코인 이자' 문제 제기
트럼프 대통령의 이해충돌 문제와 별도로 은행권의 반발도 법안 협상을 어렵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은행협회(ABA), 독립커뮤니티은행협회(ICBA)를 비롯한 은행단체들은 암호화폐 거래업체들이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이자나 수익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할 경우 예금이 은행에서 빠져나가 지역은행의 대출 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화당이 표결 직전 내놓은 최종안에는 스테이블코인으로 인해 커뮤니티은행의 예금이 크게 빠져나갈 경우 재무장관이 개입할 수 있는 이른바 '서킷 브레이커'가 추가됐지만, 은행단체들은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관련 규정의 추가 강화를 요구했다.
반면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는 스테이블코인 수익 지급을 제한하지 않을 경우 지역은행 대출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은행권의 주장이 과장됐다는 분석을 내놓는 등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은행권의 견해도 맞서왔다.
암호화폐 시장 즉각 반응...비트코인 한때 5% 이상 하락
법안 통과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소식에 암호화폐 시장도 즉각 반응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상원 표결이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하루 기준 5% 이상 하락했고,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와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Circle)의 주가는 장중 한때 각각 10% 안팎까지 떨어졌다.
코인베이스 최고경영자 브라이언 암스트롱(Brian Armstrong)은 표결 결과에 실망감을 나타내면서도 SEC와 CFTC가 기존 권한을 이용해 보다 명확한 규칙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업계에서는 행정부 산하 규제기관이 만드는 규칙은 정권 교체나 법원 판결에 따라 변경될 가능성이 있어 의회가 법률로 확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악관도 법안 통과 실패 이후 SEC와 CFTC 등 행정부 기관을 통한 디지털자산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백악관 암호화폐 정책 담당자인 패트릭 위트(Patrick Witt)는 미국 의회가 규제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향후 세계 금융시장의 디지털자산 기준을 유럽이나 중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안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중간선거 앞두고 시간 촉박
이번 표결로 클래러티법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틸리스 의원이 절차적으로 재검토 가능성을 남겨놓은 만큼 상원 지도부가 협상안을 수정해 다시 표결에 부칠 수 있다.
그러나 의회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워싱턴을 떠날 예정이고 10월에는 정규 입법 일정이 사실상 중단되는 만큼, 선거 전에 다시 60표를 확보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AP는 법안을 추진해 온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번 회기에 처리하지 못할 경우 법안이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지난해 하원에서 민주당 의원 78명까지 가세해 초당적으로 통과했던 클래러티법은 1년여 뒤 상원에서는 단 한 명의 민주당 의원도 확보하지 못하면서 멈춰섰다. 암호화폐 자체를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양당 일부 의원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의 암호화폐 이해관계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 스테이블코인과 기존 은행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가 미국의 포괄적인 디지털자산 규제체계 마련을 가로막는 핵심 쟁점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