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1 09:40 AM
By 전재희
초부유층 자녀 증여에 널리 쓰이는 GRAT 놓고 세법 공방
미국 국세청(IRS)이 초부유층들이 자녀에게 막대한 재산을 넘기면서 증여세와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널리 활용해온 신탁 구조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IRS는 테네시주 내슈빌에 거주하는 척 엘칸(Chuck Elcan)과 트리샤 엘칸(Trisha Elcan) 부부에게 총 7억3,600만달러에 달하는 증여세와 벌금을 부과했다.
문제의 핵심은 부유층 자산 이전에 자주 사용되는 'Grantor-Retained Annuity Trust', 이른바 GRAT이다.
엘칸 부부는 세 딸에게 자산을 이전하기 위해 GRAT을 사용했지만, IRS는 그 과정에서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부는 이에 반발해 미국 조세법원(U.S. Tax Court)에서 IRS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엘칸 부부 측 변호사인 존 포터(John Porter)는 "IRS의 해석을 적용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결과가 나온다"며 해당 GRAT 운영 방식이 세법상 적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GRAT은 자산가가 주식 등 향후 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자산을 일정 기간 신탁에 넣은 뒤, 처음 넣었던 자산가치와 일정한 이자를 연금 형태로 돌려받고 그 이상의 초과 상승분을 자녀 등 수혜자에게 이전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자산가가 주식 1,000만달러를 GRAT에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신탁을 설정할 때 적용되는 연방 기준금리만큼의 원금과 이자는 일정 기간 동안 다시 자산가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해당 주식의 가치가 이 기준금리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면 초과 상승분은 자녀 등 수혜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초과 상승분에는 증여세나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을 수 있다.
WSJ에 따르면 2026년 9월 GRAT에 적용되는 연방 기준금리는 5.4%다.
즉 신탁에 들어간 자산이 연평균 5.4%를 초과해 상승하면 그 초과분이 세금 부담 없이 다음 세대로 이전될 수 있다는 의미다.
GRAT이 부유층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이다.
신탁에 넣은 자산이 기준금리 이상의 수익률을 내지 못하면 자산은 연금 지급 형식으로 대부분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온다.
뉴욕대 세법센터(Tax Law Center)의 마이크 케르처(Mike Kaercher) 부국장은 GRAT에 대해 "대체로 후회할 것이 없는 절세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GRAT이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면 해당 자산을 다시 새로운 GRAT에 넣어 재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부유층은 만기가 2년 정도인 단기 GRAT을 반복적으로 설정하는 이른바 '롤링 GRAT' 전략을 사용한다.
최근 주식시장의 상승세도 GRAT 사용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WSJ에 따르면 10년 전 아마존 주식 100만달러를 2년짜리 GRAT에 계속 반복적으로 넣었다면 약 450만달러를 자녀 등 수혜자에게 증여세와 상속세 없이 이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2022년 아마존 주가가 크게 하락했던 시기를 포함하고도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세무법인 아르마니노 어드바이저리(Armanino Advisory)의 로런 와그너(Lauren Wagner)는 GRAT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수익이 나는 해와 손실이 나는 해가 섞이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전체 성과가 기준금리를 웃돌기를 기대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개인당 평생 증여·상속세 면제 한도가 1,500만달러 수준이다.
재무설계 전문가들은 순자산이 이미 1,500만달러에 도달한 뒤가 아니라 자산 증가 속도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할 때 GRAT을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리콘밸리의 한 대형 기술기업에서 근무하는 40대 고객의 사례도 소개됐다.
이 고객은 2024년 3월 이후 총 820만달러 상당의 자산을 여러 개의 GRAT에 넣었으며, 현재까지 약 310만달러를 두 자녀를 위한 신탁으로 이전했다.
이에 따른 증여·상속세 절감 효과는 100만달러 이상으로 추산됐다.
이번 IRS 소송의 당사자인 트리샤 엘칸은 미국 대형 병원 운영업체인 HCA Healthcare 공동창업 가문의 일원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1968년 HCA 설립에 참여했다.
트리샤는 2018년 세 개의 GRAT을 만들고 약 15억달러 상당의 자산을 넣었다.
신탁 명칭은 각각 Patricia Frist Elcan 2018 Annuity Trust I, II, III였다.
신탁에는 HCA Healthcare 주식을 보유한 지주회사 지분이 들어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GRAT은 성공적으로 자산가치가 상승해 결과적으로 세 딸을 위한 신탁에 약 2억달러 상당의 자산이 이전됐다고 엘칸 측 변호사는 설명했다.
반면 2018년 8월 설정된 세 번째 GRAT은 자산 상승률이 기준금리를 넘지 못해 사실상 실패했다.
이번 사건에서 IRS가 문제 삼은 것은 GRAT 자체가 아니다.
쟁점은 트리샤 엘칸이 GRAT에 들어 있던 자산을 다시 사들이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식이다.
트리샤는 GRAT으로부터 자산을 매입하면서 현금을 지급하는 대신 이자가 붙는 약속어음(promissory note)을 발행했다.
즉 현금을 즉시 지급하는 대신 앞으로 갚겠다는 채무증서를 신탁에 제공한 것이다.
이후 GRAT의 수탁자는 트리샤에게 지급해야 할 연금 중 일부를 이 약속어음 채무와 상계했다.
쉽게 말하면 GRAT이 트리샤에게 지급해야 할 돈과 트리샤가 GRAT에 갚아야 할 돈을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IRS는 바로 이 방식이 GRAT 운영을 규정한 세법 규칙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IRS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세금 규모는 막대하다.
IRS는 트리샤가 세 개 GRAT에 넣은 자산 자체가 모두 과세 대상 증여라고 보고 있다.
심지어 투자 성과가 나지 않아 실패했던 세 번째 GRAT에 들어갔던 자산도 포함된다.
IRS는 이에 따라 6억1,400만달러의 증여세와 1억2,20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려 하고 있다.
총액은 7억3,600만달러다.
미국 최고 증여세율 40%를 적용한 결과다.
트리샤의 남편 척도 세금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부가 세법상 증여를 공동 증여로 처리하도록 선택했기 때문에 남편도 해당 세금 책임을 함께 부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칸 부부는 IRS의 해석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트리샤가 사용한 약속어음 방식은 세법과 관련 규정에 모두 부합하며 GRAT을 이용한 거래에서 허용되는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트리샤 엘칸은 GRAT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는 2010년부터 최소 2019년까지 매년 하나 이상의 GRAT을 설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엘칸 부부는 현재 조세법원에 약식판결(summary judgment)을 신청하고 IRS의 주장을 법원이 재판 없이 기각해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현재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소송 결과는 초고액 자산가들의 상속·증여 전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GRAT 자체는 미국 부유층의 자산승계에 이미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GRAT 내부의 자산을 약속어음으로 교체하거나 회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IRS가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상속·증여 전문 변호사들은 IRS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약속어음을 활용하는 방식을 피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마이애미의 로펌 그린버그 트라우리그(Greenberg Traurig)에서 프라이빗 웰스 부문을 이끄는 다이애나 자이델(Diana Zeydel)은 "GRAT에서는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는 IRS의 법적 주장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현재 상황에서 굳이 공격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GRAT을 둘러싼 논쟁은 이번 사건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과거 GRAT을 비롯해 부유층이 사용하는 다양한 신탁 절세전략을 제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당시 행정부는 관련 규제 강화가 10년 동안 약 840억달러의 세수 증가 효과를 낼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관련 법안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서 GRAT 사용은 오히려 증가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기술주와 대형 성장주가 급등하면서 주식을 대량 보유한 기업 창업자와 임원, 투자자들에게 GRAT은 대표적인 자산승계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엘칸 사건은 GRAT 자체의 존폐를 다투는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초부유층이 GRAT 내부 자산을 관리하고 이익을 확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다 복잡한 거래 방식 가운데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다.
법원이 IRS의 손을 들어줄 경우 약속어음 등을 활용한 일부 GRAT 절세전략에 상당한 제약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엘칸 부부가 승소한다면 초부유층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보다 적극적인 GRAT 운용 방식에 법적 근거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번 7억3,600만달러 규모의 세금 분쟁은 한 가족의 세금 문제를 넘어, 미국 초고액 자산가들이 수십억달러의 재산을 다음 세대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어디까지 세법상 허용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