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1 09:55 PM
By 전재희
엘리슨, 5년간 미국 제작에 15억달러 추가 투자 제안하며 돌파구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Paramount Skydance)의 810억달러 규모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arner Bros. Discovery) 인수를 둘러싸고 수개월 동안 대립해온 파라마운트와 캘리포니아주가 극적인 합의에 도달한 배경에는 막대한 거래 지연 비용과 파라마운트의 캘리포니아 이전 가능성, 그리고 15억달러 규모의 미국 내 제작 투자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달 초까지만 해도 파라마운트 최고경영자(CEO) 데이비드 엘리슨(David Ellison)과 롭 본타(Rob Bonta)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사이에서는 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가 거의 없었다.
본타 장관이 이끄는 캘리포니아 등 12개 주는 파라마운트와 워너의 합병이 영화와 케이블TV 시장의 경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지난 7월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으로부터 거래 완료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명령까지 받아냈다.
당시 본타 장관은 자산 매각이나 일부 조건 변경으로 합병을 승인하는 방식보다는 거래 자체를 막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 모두 상당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급했던 쪽은 파라마운트였다.
엘리슨은 약 1년에 걸쳐 워너 인수를 추진해왔고, 거래가 10월 1일까지 완료되지 않을 경우 워너 주주들에게 분기당 6억5,000만달러를 추가 지급해야 하는 계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하루로 환산하면 약 700만달러다.
거래가 몇 달만 지연돼도 파라마운트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수억달러씩 늘어나는 구조였다.
WSJ에 따르면 이번 합의에 따라 파라마운트는 약 2주 안에 거래를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이 같은 'ticking fee' 대부분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역시 부담이 없지 않았다.
파라마운트는 합병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10월 1일부터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방안을 검토했으며, 테네시주 관계자들과 실제로 이전 문제를 논의했다고 WSJ은 전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파라마운트가 캘리포니아를 떠날 경우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상징적 타격도 상당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 캘리포니아 영화·TV 산업은 코로나19 사태와 2023년 작가·배우 파업, 다른 주와 해외의 적극적인 제작 인센티브 등으로 인해 촬영과 제작 일자리가 감소해왔다.
이 때문에 파라마운트까지 캘리포니아를 떠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주정부와 로스앤젤레스 정치권에서도 우려가 커졌다.
이 과정에서 개빈 뉴섬(Gavin Newsom)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역할을 했다.
WSJ에 따르면 뉴섬 주지사는 본타 법무장관과의 대화에서 파라마운트를 잃을 경우 캘리포니아 경제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는 입장을 반복해서 전달했다.
뉴섬은 본타 측이 법정에서 승소하지 못할 가능성도 우려했으며, 때때로 파라마운트와 법무장관 측 사이에서 비공식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다만 최종 합의 발표 이후 본타 장관은 이번 합의가 합병 자체를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주정부가 근로자와 경쟁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양보를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뉴섬 주지사는 합의를 "캘리포니아 근로자와 창작 경제를 위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는 뉴섬의 공식 평가다.
협상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지난주 엘리슨이 제안한 새로운 투자안이었다.
엘리슨은 앞으로 5년 동안 미국 내 영화 제작에 기존 계획보다 최소 15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매년 최소 3억달러의 추가 제작비를 국내 제작에 투입하는 수준이다.
최종 합의에서도 파라마운트는 미국 내 제작에 5년간 최소 15억달러를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로이터가 공개된 합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회사는 영화 제작 편수와 독립영화 투자, 노동자 지원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엘리슨은 합의 마무리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와 북가주를 오가며 본타 장관과 주정부 관계자, 다른 주 법무장관들을 직접 만났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제작 투자 외에도 CNN과 CBS의 편집 독립성, 엔터테인먼트 노동자 지원, 영화 제작 편수, 케이블 채널 매각 가능성 등 광범위한 문제가 논의됐다.
가장 민감했던 쟁점 가운데 하나는 CNN이었다. 캘리포니아와 코네티컷 측에서는 CNN을 포함한 일부 케이블 채널 매각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파라마운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케이블TV 시청률은 장기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CNN을 비롯한 케이블 채널들은 여전히 상당한 현금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파라마운트와 워너가 합병하면 새 회사가 약 800억달러에 가까운 부채를 부담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케이블TV에서 발생하는 현금은 부채 상환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최종 합의에서는 CNN을 강제 매각하는 대신 CNN과 CBS의 편집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감독체계를 두기로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새로운 'News Editorial Independence Board'가 만들어져 두 뉴스 조직의 편집 독립성과 저널리즘 기준을 감독하게 된다.
파라마운트는 영화 제작과 극장 개봉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약속을 했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합병회사는 첫 2년 동안 매년 최소 30편의 영화를 극장에 개봉하고, 이후 3년 동안에는 연간 최소 32편을 내놓아야 한다.
그 가운데 매년 최소 4편은 독립영화여야 하며 일정 비율은 대형 상업영화로 구성하도록 했다.
약속한 영화 편수를 채우지 못하면 부족한 영화 한 편당 3,000만달러의 페널티가 부과될 수 있으며 상당 부분은 엔터테인먼트 업계 노동자 지원기금으로 들어간다.
합병회사는 극장 사업자들에게 적용하는 조건도 일정 기간 불리하게 변경하지 않기로 했다.
또 파라마운트와 워너의 기본 케이블 채널 유통계약을 일정 기간 별도로 협상해 두 회사가 하나의 거대한 채널 묶음을 이용해 시장지배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제한하는 조건도 포함됐다.
특히 주정부는 파라마운트의 약속을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이행 장치를 요구했다.
WSJ에 따르면 파라마운트가 케이블 채널 유통계약 분리나 영화 제작 편수 등 주요 합의 조건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일부 자산을 처분해야 할 가능성까지 포함됐다.
대상에는 일부 케이블 네트워크 또는 파라마운트가 보유한 미라맥스(Miramax) 지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최종 합의에는 독립적인 감독관과 컴플라이언스 모니터, 그리고 5개 주가 참여하는 감독위원회를 두는 내용도 포함됐다.
뉴욕주도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WSJ에 따르면 엘리슨은 지난 금요일 레티샤 제임스(Letitia James) 뉴욕주 법무장관을 만났다.
제임스 장관은 합병 과정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 노동자 보호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으며, 별도의 합병 저지 소송을 제기했던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WGA)에 대한 조건 개선도 요구했다.
21일 최종 발표된 합의에는 노동자 지원을 위한 4,750만달러 규모 기금도 포함됐다. AP와 로이터에 따르면 WGA 역시 이후 파라마운트와 합의하면서 별도의 소송을 마무리했다.
이번 합의는 불과 두 달 전 분위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본타 장관은 지난 7월 소송을 제기한 뒤 파라마운트 측이 일부 사업을 매각하거나 시정 조치를 내놓는 방식으로 합병을 허용하는 데 관심이 없다며 "우리는 합병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 파라마운트의 이전 가능성과 할리우드 제작산업의 침체, 법정 공방의 불확실성, 노동계와 극장업계의 합의 요구 등이 겹치면서 협상 환경이 달라졌다.
반대로 파라마운트도 처음에는 합병이 경쟁을 오히려 강화한다며 큰 폭의 양보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래 지연 비용이 커지면서 제작투자와 노동자 보호, 편집 독립성 등에 대한 양보안을 제시했다.
양측은 결국 회사의 핵심 사업을 강제로 분할하지 않는 대신 일정 기간 제작·고용·유통·언론 독립성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합의가 발표된 뒤 엘리슨은 본타 장관과 뉴섬 주지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합병회사의 본사를 로스앤젤레스에 계속 두겠다고 밝혔다.
엘리슨은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본타 장관은 합의를 통해 근로자들을 위한 의미 있는 조건을 확보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번 합의가 이 합병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최종 합의로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12개 주가 제기한 가장 큰 법적 장애물이 제거되면서 파라마운트는 워너 인수를 완료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AP와 로이터에 따르면 합의에는 법원의 최종 승인 절차가 남아 있지만 기존의 거래 중지 명령은 해제되는 구조다.
이번 협상 과정은 파라마운트가 단순히 법정에서 반독점 소송을 이기려 하기보다, 제작 투자 확대와 근로자 지원이라는 '당근'과 캘리포니아를 떠날 수 있다는 압박을 동시에 활용하면서 합의를 끌어낸 과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캘리포니아 입장에서도 이미 침체를 겪고 있는 할리우드 제작산업에서 대표적인 스튜디오 하나를 잃을 가능성과 대형 미디어 합병에 따른 경쟁 감소 우려 사이에서 현실적인 절충점을 선택한 사례가 됐다.
파라마운트와 워너의 합병이 최종 완료되면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뿐 아니라 HBO Max와 Paramount+, CBS와 CNN 등 미국의 주요 영화·스트리밍·방송 자산이 하나의 거대 미디어그룹 아래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