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2 09:44 AM
By 전재희
WSJ "베이징, 미국의 대만 방위 의지 불확실성 활용"
시진핑, 국민당 정리원 주석 직접 만나...방중 발언 사전 조율 정황도
대만서 미국 신뢰도 24%로 하락...중국은 "저항해도 소용없다" 인식 확산 노려
중국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를 대만을 중국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이례적인 기회로 판단하고, 군사적 압박과 함께 대만 내부의 정치·여론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가 노리는 것은 당장 대만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다.
대만 내부에서 "중국에 저항해도 결국 승산이 없고, 미국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만을 지켜주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대만 사회가 스스로 베이징과의 관계 개선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 대만 제1야당 국민당(KMT)의 정리원(Cheng Li-wun) 주석이다.
정리원 주석은 지난 4월 중국을 6일간 방문했다. 대만 주요 정당 대표가 중국을 공식 방문한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중국 측은 정 주석에게 고위급 회담과 상하이 관광, 중국 첨단산업 시설 방문 등을 제공했으며 일정의 마지막에는 시진핑(Xi Jinping)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도 마련했다.
로이터도 당시 정 주석의 방문을 양안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평화 방문'으로 소개했으며, 시진핑은 회담에서 대만 독립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통일을 향한 움직임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WSJ은 공개되지 않았던 사전 협의 과정도 있다고 전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중국 당국자들은 방문 수개월 전부터 국민당 협상 관계자들과 만나 정 주석이 중국에서 사용할 표현을 조율했다.
정 주석은 자신이 대만 독립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준비된 발언문을 중국 측에 사전에 전달했고, 해당 내용은 시진핑 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WSJ은 전했다.
국민당은 중국에 굴복하고 있다는 해석을 부인한다.
국민당은 WSJ에 "국민당의 접근법은 일관되게 대만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며 "대만의 민주주의와 생활방식을 보호하면서 양안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정 주석 자신도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접근법에 반대한다.
그는 "왜 둘 다 선택할 수 없는가. 왜 반드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국과도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WSJ이 주목한 것은 정 주석 개인보다 그를 활용하려는 중국의 더 큰 전략이다.
중국은 대만 주변에서 군사훈련과 군용기·군함 활동을 계속하는 동시에 대만 내부에서는 정치적·정보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이중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WSJ에 따르면 중국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대만인들에게 중국의 압력이 장기적으로 계속될 것이며 미국의 지원도 확실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맞서는 것보다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여론을 형성하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대만 정부 역시 중국의 군사적 압박뿐 아니라 이른바 '인지전(cognitive warfare)'을 주요 안보 문제로 보고 있다.
대만 국가안전국은 지난해 중국발 사이버공격이 핵심 인프라를 대상으로 하루 평균 약 263만 건 발생했다고 밝히면서 사이버공격과 허위정보, 군사활동 등을 결합한 중국의 '하이브리드 전쟁' 전략을 경고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사이버공격 개입 주장을 부인해왔다.
WSJ에 따르면 대만 국가안전국은 중국이 온라인 플랫폼과 가짜 웹사이트 등을 이용해 대만을 겨냥한 전면적인 인지전을 벌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만 당국이 확인한 중국 관련 의심 계정은 2024년 약 2만8,000개에서 2025년 약 4만5,000개로 증가했다.
대만 정부는 라이칭더(Lai Ching-te) 총통과 샤오메이친(Hsiao Bi-khim) 부총통이 대화하는 것처럼 제작된 딥페이크 영상 등도 중국과 연계된 허위정보 사례로 지목했다.
영상에는 미국이 더 이상 중국을 견제할 능력이 없으며 언젠가는 대만을 중국과 거래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가짜 대화가 들어 있었다고 WSJ은 전했다.
대만 안보 당국은 지난해 국민당 주석 선거 과정에서도 정리원을 지지하거나 경쟁 후보들을 공격하는 중국발로 의심되는 유튜브·틱톡 콘텐츠를 추적했다고 밝혔다.
당국은 일부 계정의 배후를 중국 군 관련 조직과 연결지었다고 WSJ은 보도했다.
다만 중국 정부는 대만 선거에 허위정보를 이용해 개입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WSJ은 중국이 지금을 특별한 기회로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트럼프 대통령을 꼽았다.
트럼프가 대만을 둘러싼 미국의 기존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대만에서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공약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갔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고, 대만에 대한 140억달러 규모의 추가 무기판매 패키지를 중국과의 협상 카드로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로이터는 22일 시진핑이 이번 주 워싱턴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대만 무기판매 중단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이미 약 110억달러 규모의 대만 무기판매를 승인했지만 추가 140억달러 규모 패키지는 아직 보류돼 있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종료했지만,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에 따라 대만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도록 무기와 관련 지원을 제공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일방적인 현상 변경 반대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파고들려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대만 사회의 미국에 대한 불신이다.
브루킹스연구소가 올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대만 유권자 가운데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4%에 그쳤다.
정당별 차이는 더 컸다.
친미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집권 민진당(DPP) 지지자 가운데 미국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도 45.3%에 그쳤다.
국민당 지지자의 경우 약 60%가 미국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미국을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약 8%였다.
또 전체 응답자의 약 40%는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실제로 대만을 지원할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한 비율은 약 35%였다.
브루킹스는 대만 내 미국에 대한 신뢰가 최근 몇 년간 전반적으로 낮아졌으며, 특히 트럼프 2기 들어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WSJ은 바로 이 부분을 베이징이 활용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의 창'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대만 대륙위원회의 추추이정(Chiu Chui-cheng) 주임위원은 중국 지도부가 트럼프의 미국 안보공약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이 시진핑에게 대만 여론을 움직일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한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대만 정부는 미국과 대만의 실질적인 안보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대만 대륙위원회는 지난 5월 트럼프-시진핑 회담 이후에도 미국의 대만 정책에는 변화가 없고, 미국이 중국에 대만 무기판매와 관련해 새로운 약속을 한 것도 없다고 밝혔다.
베이징의 또 다른 전략은 국민당과의 관계 강화다.
국민당은 1949년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한 뒤 대만으로 이동한 정당이다.
과거 장제스(Chiang Kai-shek) 총통 시절에는 중국 공산당과 적대관계였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양안 긴장 완화와 경제교류 확대를 강조해왔다.
현재 국민당은 즉각적인 중국과의 통일에는 반대하지만, 독립 성향이 강한 민진당보다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선호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리원 주석 역시 중국과의 대화를 통해 전쟁 가능성을 낮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지난 4월 중국으로 출발하면서 이번 방문을 "역사적인 평화의 여정"이라고 표현하고 "대만을 전쟁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주석의 대중국 접근방식은 대만 내부에서도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92년 합의(1992 Consensus)'를 해석하는 방식이 쟁점이다.
1992년 국민당 정부와 중국 측 협상 관계자들은 양안이 모두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각각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관계를 관리했다.
국민당은 이를 흔히 '하나의 중국, 각자 해석'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이 궁극적으로 대만을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왔다.
시진핑은 2019년 이 개념을 중국과 대만의 통일 및 홍콩에서 적용된 '일국양제'와 직접 연결했다.
WSJ에 따르면 정리원은 이번 방중 과정에서 기존 국민당이 강조해온 '각자 해석'이라는 표현보다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 반대를 보다 분명하게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일부 국민당 인사들과 대만인들은 정 주석이 기존 국민당 입장보다 중국의 해석에 가까워진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했다. 정 주석은 자신의 노선이 중국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반박했다.
중국이 대만 내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지만, 이것이 대만인들의 통일 지지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WSJ이 인용한 대만 국립정치대의 장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과의 통일을 지지하는 비율은 약 30년 전 22%에서 현재 8% 미만으로 떨어졌다.
대만 사회의 다수는 즉각적인 독립 선언이나 중국과의 통일보다는 현재의 사실상 자치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해왔다.
따라서 베이징의 전략도 대만인들에게 곧바로 통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보다는 미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중국과의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여론을 확대하는 보다 장기적인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WSJ은 분석했다.
대만에서는 오는 11월 시장과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선출하는 지방선거가 열린다.
현재 국민당은 대만 입법원을 장악하고 있으며 최근 이 힘을 이용해 라이칭더 정부가 추진하던 400억달러 규모의 특별 국방예산을 축소하도록 압박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지방선거보다 더 큰 목표가 2028년 대만 총통선거다.
민진당은 2016년 이후 총통직을 유지하고 있다.
WSJ은 중국이 장기적으로 정리원이 이끄는 국민당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대만 내부에서도 정 주석의 친중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오히려 국민당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 국민당 고위 관계자 알렉산더 황(Alexander Huang)은 정 주석의 당내 기반을 "확고하지만 크지는 않다"고 평가하면서 젊은 국민당원들을 포함해 상당수 당원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이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정상회담에서는 무역과 희토류, 인공지능, 미국-이란 문제와 함께 대만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특히 시진핑은 미국이 1982년 미중 공동성명에 따라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제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대만 문제를 미중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이익'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가 중국과 경제·무역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대만과 관련한 기존 미국의 입장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대만과 일본을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파트너들은 트럼프가 중국과 경제적 양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대만 문제에 대한 표현을 변경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미국 정부가 대만과 관련한 기존 정책을 공식 변경한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WSJ 보도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중국의 대만 전략이 군사적 압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대만 주변에서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국민당과의 관계 강화, 경제·문화 교류,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영향력 활동 등을 병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대만인들에게 "미국의 지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중국과 계속 맞서는 것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WSJ은 분석했다.
반면 국민당은 중국과의 대화가 대만을 중국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고 대만의 민주주의와 생활방식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대만 집권 민진당과 안보당국은 중국이 군사·경제 압박뿐 아니라 허위정보와 정치적 영향력 활동을 통해 대만의 민주주의 과정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중국은 이 같은 개입 의혹을 부인하면서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추구하지만 필요할 경우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시진핑이 트럼프 2기를 정말 대만 문제에서 '드문 기회의 창'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미국이 실제로 대만 정책을 얼마나 유지하는지, 대만인들이 미국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내세운 국민당이 대만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얻는지에 달려 있다.
이번 주 워싱턴에서 열리는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은 그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즉 미국의 대만 정책이 중국의 압박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인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