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2 09:43 PM
By 전재희
트럼프·프레데릭센·닐센, 뉴욕 유엔본부서 3자 협정 서명
미군, 나르사르수아크·메스터스비그에 새 방위거점...피투피크 우주기지도 확대
덴마크 주권·그린란드 자결권 명시...중·러 등 비NATO 국가 군사거점 차단
미국과 덴마크, 그린란드가 북극과 북대서양 안보 강화를 위한 새로운 3자 안보협정에 정식 서명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메테 프레데릭센(Mette Frederiksen) 덴마크 총리, 옌스-프레데리크 닐센(Jens-Frederik Nielsen) 그린란드 총리는 22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를 계기로 만나 협정문에 서명했다.
이번 협정은 미국의 그린란드 군사활동을 대폭 확대하는 대신 덴마크 왕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 그린란드 주민들의 자결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덴마크 총리실은 협정이 "북극과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를 강화한다"며 NATO 체제에 깊이 기반한 합의라고 밝혔다.
이번 협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의 그린란드 군사 거점 확대다.
공개된 협정문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그린란드 남부 나르사르수아크(Narsarsuaq)와 동부 메스터스비그(Mestersvig)에 새로운 방위구역을 설치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미국이 그린란드에서 운용하는 유일한 주요 군사시설인 북서부 피투피크 우주기지(Pituffik Space Base)도 현대화하고 확대할 수 있다.
피투피크 기지는 미국과 NATO의 탄도미사일 조기경보, 미사일 방어, 우주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전략 거점이다.
AP에 따르면 현재 이곳에는 약 200명의 미군이 배치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그린란드 전역 17개 기지와 시설에 수천 명의 미군이 있었지만 냉전 종식 이후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정 서명에 앞서 미국이 그린란드에서 "즉시 대규모 군사력 구축을 시작할 것"이라며 2개의 주요 군사기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협정은 미군 항공기와 함정이 그린란드 전역과 영해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군 항공기에는 영공 통과와 착륙권이, 함정에는 그린란드 영해 접근권이 주어진다. 해저 접근 권한도 포함됐다.
미국은 필요할 경우 추가 방위구역을 설치하고 기존 군사시설과 작전을 확대할 수도 있다.
협정은 이 같은 미국의 군사 접근이 그린란드와 북미 대륙, NATO 지역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차세대 미사일 방어체계인 '골든돔(Golden Dome)'과 연계될 가능성도 열어뒀다. 다만 프레데릭센 총리는 골든돔과 관련한 구체적인 배치 내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에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 NATO 회원국이 아닌 국가가 그린란드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차단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협정에 따르면 비NATO 국가는 당사국들의 별도 합의가 없는 한 그린란드에 유인 또는 무인 군사시설을 설치하거나 지속적인 군사적 주둔을 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중국과 러시아의 북극 진출을 이유로 미국이 그린란드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감소하면서 새로운 북극항로가 열리고, 러시아와 중국이 이 지역에서 군사·경제 활동을 확대하면서 그린란드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협정의 안보 개념은 군사시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이터가 공개된 협정문을 분석한 결과, NATO 회원국이나 NATO 파트너국,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는 국가의 투자자가 그린란드의 민감한 산업에서 지배권이나 중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도 제한된다.
그린란드 정부가 외국인 투자를 심사해 이를 집행하게 된다.
이는 중국 기업 등이 그린란드의 항만, 통신, 인프라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업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다만 이번 안보협정에는 미국 기업의 그린란드 광산이나 천연자원 개발권을 별도로 보장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그린란드는 희토류를 비롯한 핵심광물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어 미국과 중국의 자원 경쟁 측면에서도 주목받아왔다.
이번 협정에서 덴마크와 그린란드가 가장 강조한 부분은 주권이다.
협정은 덴마크 왕국의 주권과 영토적 완전성을 존중하고 그린란드 주민들의 자결권을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서명 후 "그린란드와 덴마크 왕국, 미국뿐 아니라 NATO와 유럽에도 좋은 합의"라며 "우리의 공동 방위와 안보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협정이 덴마크 왕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 그린란드인들의 자결권을 존중한다고 강조했다.
닐센 그린란드 총리 역시 "협정은 우리가 자결권을 가진 하나의 국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며 그린란드가 북극 공동안보의 당사자로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AP에 따르면 닐센은 이번 합의를 "윈-윈-윈 협정"이라고 표현하면서 "당신들의 안보가 우리의 안보이며 우리의 안보가 당신들의 안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협정은 그린란드가 향후 덴마크에서 독립하더라도 자동으로 종료되지 않는다.
협정문에 따르면 그린란드가 독립국이 될 경우 NATO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거나 필요한 경우 NATO 가입 절차를 밟고, 현재 덴마크가 부담하고 있는 협정상의 권리와 의무를 승계하게 된다.
이는 향후 그린란드의 정치적 지위가 바뀌더라도 미국과 NATO의 군사 접근권을 장기간 유지하려는 장치다.
협정에는 별도의 종료시점도 없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상호 합의가 있을 때만 수정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몇 명의 미군이 추가 배치될지, 두 신규 기지를 언제 완공할지 등의 일정은 명시되지 않았다.
이번 합의는 수개월간 미국과 덴마크·그린란드 사이를 흔들었던 외교적 갈등의 타협점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인 2019년부터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밝혀왔으며 두 번째 임기 들어서는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그린란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부 발언에서는 군사력 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 NATO 동맹국인 덴마크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미국이 NATO 동맹국 영토를 강제로 점령한다면 대서양동맹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린란드 주민들 사이에서도 미국에 영토가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그러나 수개월간 미국·덴마크·그린란드 당국자들이 비공개 협상을 진행한 끝에 주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국의 안보 요구를 군사 접근권 확대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이번 협정을 통해 미국은 그린란드 영토를 직접 소유하지 않고도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 접근권을 확보하게 됐다.
반면 덴마크와 그린란드는 미국의 영토 인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북극 안보에 미국과 NATO를 더 깊이 참여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식에서 이번 협정에 대해 "유럽과 미국, 그리고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라며 그린란드에도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이를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합의"라고 표현하면서 미국의 적대국이 그린란드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트럼프의 안보 우려에는 자신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NATO의 마르크 뤼터(Mark Rutte) 사무총장도 협정 체결을 환영하며 북극 지역에서 NATO의 역할 확대와 이번 합의가 동맹 전체의 집단안보를 강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뤼터의 공식 평가다.
다만 협정이 정식으로 서명됐다고 해서 즉시 모든 조항이 발효되는 것은 아니다.
덴마크 정부는 협정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필요한 국내 의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그린란드와 덴마크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것으로 로이터는 설명했다.
따라서 이번 22일 서명은 미국·덴마크·그린란드 정부 사이의 정치적·법적 합의를 확정한 단계이며, 실제 새로운 미군 방위구역 설치와 관련 조치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후속 승인 절차가 남아 있다.
이번 협정이 최종 발효되면 미국은 냉전 이후 크게 축소했던 그린란드 군사력을 다시 확대하면서 북극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거점을 강화하게 된다.
동시에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자치령이라는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미국·덴마크와 함께 협정에 직접 서명한 당사자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국제안보 문제에서 보다 독립적인 역할을 확보하게 됐다.
결국 수개월간 이어진 '미국의 그린란드 인수' 논란은 영토의 소유권을 미국에 넘기는 대신, 덴마크의 주권과 그린란드의 자결권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장기적인 군사 접근권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