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3 07:46 AM

트럼프, 경유 수출금지 카드 꺼내자 석유업계 '비상'...에너지장관도 공개 반대

By 전재희

미국 경유값 갤런당 6.53달러 사상 최고...농민·운송업계 부담 급증
중간선거 앞둔 공화당 의원들 "수출 막아 국내 공급 늘려야"
정유업계 "생산 감소해 휘발유까지 오를 수 있어"...라이트 장관도 "효과 없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미국 경유 가격을 낮추기 위해 경유 수출 제한을 검토하면서 미국 석유·정유업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농업지역을 중심으로 경유 가격 상승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커지면서,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석유업계와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모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뉴욕 유엔총회 참석 중 경유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트럼프가 경유 수출금지 아이디어를 지지한다고 직접 말했다고 보도했다.

경유는 대형 트럭과 농기계, 건설장비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가격 상승은 주유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 생산과 물류, 식료품·전자제품 등 각종 상품의 운송비를 통해 전체 소비자 물가로 번질 수 있다.

미국 경유값 갤런당 6.53달러...사상 최고

미국 경유 가격은 중동과 러시아를 둘러싼 전쟁으로 세계 정유·운송망이 흔들리면서 급등했다.

WSJ에 따르면 22일 미국 평균 경유 가격은 갤런당 6.53달러까지 올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디젤 평균가격
(전국 평균 디젤가격 사상 최고치. AAA)

로이터 역시 이란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 중동 주요 산유국의 정유시설과 수출망에 차질이 생기면서 미국과 유럽의 경유 가격이 기록적인 수준까지 상승했다고 전했다.

세계 경유 공급 부족은 원유 부족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원유가 있어도 이를 경유·휘발유·항공유 등으로 가공할 정유시설이 필요하다. 현재 전 세계 정유공장 대부분이 이미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어 단기간에 경유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가 어렵다.

미국 정유시설 역시 최근 8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가동되고 있지만, 경유 재고는 여전히 계절 평균보다 크게 낮은 상태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농업지역 공화당 의원들 "수출 막아라"

경유 가격 급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미국 농업지역이다.

농민들은 트랙터와 수확기뿐 아니라 비료 운송과 곡물 수송에도 많은 경유를 사용한다.

WSJ에 따르면 아이오와주의 척 그래슬리(Chuck Grassley) 연방상원의원을 비롯한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경유 수출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논리는 간단하다.

미국에서 생산된 경유를 해외로 수출하지 않고 국내 시장에 남겨두면 공급이 늘어나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주유소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싶다"며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로이터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쟁이 치열한 지역의 공화당 후보들이 기록적인 연료 가격을 낮추기 위한 대책으로 경유 수출 제한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석유업계 예상 뒤집은 트럼프

미국 석유업계는 당초 백악관이 경유 수출금지까지 실제로 검토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수출 제한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WSJ에 따르면 정유회사 임원과 로비스트들은 즉각 백악관 관계자와 공화당 의원들에게 연락해 수출금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수출 제한 조치가 나올 가능성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후원자이기도 한 유전서비스업체 캐너리(Canary)의 댄 에버하트(Dan Eberhart) CEO는 미국 기업들이 해외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면서 수출 제한은 국제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세계 경유시장의 핵심 공급국으로 부상

현재 미국 정유회사들이 우려하는 이유는 국제 경유시장에서 미국의 역할이 최근 크게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러시아의 정유시설과 수출 능력이 타격을 입었고 중동에서도 생산과 해상수송에 차질이 발생했다.

중국과 일본, 한국 등 주요 아시아 공급국들의 수출도 올해 여러 차례 감소하면서 미국이 세계시장에서 경유를 공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형 공급처 가운데 하나가 됐다. 세계 경유 공급 부족은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 정유회사 입장에서는 국제 경유 가격 상승으로 수출 마진 역시 크게 높아진 상태다.

이에 따라 수출이 막히면 수십억달러의 매출이 사라질 수 있다고 업계는 주장한다.

업계 "수출금지하면 정유공장 생산 자체 줄어"

그러나 정유업계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반론은 단순한 수익 감소가 아니다.

경유 수출을 막으면 미국 내에 경유가 남아돌면서 가격이 내려가고, 결과적으로 정유사들이 정유공장 가동률을 낮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유공장에서 경유만 따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유를 정제하면 경유와 함께 휘발유, 항공유, 기타 석유제품이 동시에 생산된다.

따라서 경유 재고가 넘쳐 정유공장이 전체 가동률을 낮추면 휘발유 생산까지 감소할 수 있다.

WSJ이 인용한 S&P Global 분석에 따르면 경유 수출금지가 시행될 경우 미국 정유공장의 처리량은 하루 약 200만 배럴, 현재 가동량의 약 12%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미국 휘발유 생산도 하루 최대 75만 배럴 감소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그렇게 되면 미국 휘발유 가격이 오히려 갤런당 약 25센트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에너지장관도 "경유 수출금지는 작동하지 않는다"

23일에는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 에너지장관은 뉴욕에서 열린 행사에서 경유 수출금지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 입장을 밝혔다.

라이트 장관은 "경유 수출을 금지하는 식의 둔탁한 정책수단은 분명히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경유 수출을 막을 경우 미국 정유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휘발유와 항공유 가격까지 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하루 전 경유 수출금지에 지지 입장을 밝힌 것과는 다른 견해다.

따라서 현재 행정부 내에서도 수출 제한의 효과를 놓고 의견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세계 경유 가격 급등하면 미국 수입물가에도 역풍

정유업계는 국제시장에 미칠 영향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경유 수출국 가운데 하나다.

미국산 경유 공급이 갑자기 중단될 경우 국제 경유 가격이 더 크게 상승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유럽과 중남미 등 미국산 경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운송비가 올라가고, 결국 해당 국가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입되는 상품 가격 역시 상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미국 내 경유 가격을 낮추기 위한 정책이 결과적으로는 해외 운송비 상승 → 미국 수입제품 가격 상승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미국 소비자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의 시장 분석도 수출금지가 단기적으로 미국 내 경유가격을 낮출 가능성은 있지만 정유공장의 효율적인 운영을 방해하고 세계 공급 부족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농업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 가능성

수출금지를 요구하고 있는 주요 세력 가운데 하나가 농업지역이지만 정유업계는 오히려 농민들이 추가적인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유 가격은 농기계 운영비뿐 아니라 비료와 농업용 화학제품의 생산·운송비에도 영향을 준다.

세계 경유 가격이 추가 상승하거나 국제무역 상대국들이 미국의 수출 제한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비료와 농업용 화학제품의 공급비용 역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유업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예상 효과이며, 실제 영향은 수출 제한의 범위와 기간, 국제시장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임시조치가 영구화될까" 업계 우려

석유업계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수출금지가 '한시적 조치'로 시작된 뒤 장기간 유지되는 경우다.

미국은 과거에도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국내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원유 수출을 장기간 제한한 전례가 있다. 미국의 원유 수출금지는 1975년 시작돼 2015년 의회가 이를 해제할 때까지 약 40년간 이어졌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것은 원유가 아닌 경유 등 정제제품이지만, 정유업계는 한번 수출규제가 도입될 경우 정치적으로 이를 다시 해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텍사스 석유생산업체 엘리베이션 리소시스(Elevation Resources)의 스티븐 프루엣(Steven Pruett) CEO는 WSJ에 경유 수출금지를 "나쁜 아이디어"라고 평가하면서 석유제품의 정상적인 국제 유통을 방해하면 결국 미국 소비자에게도 역효과가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가 내려가도 경유값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

최근 브렌트유를 비롯한 국제 원유가격은 미국과 이란의 협상 기대 등으로 배럴당 100달러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경유 가격은 원유 가격만큼 빠르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23일에도 국제 원유가격은 2주 만의 낮은 수준 부근에서 거래됐지만 경유 정제마진은 기록적인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현재 에너지 위기의 핵심이 단순히 '원유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정유시설과 경유 공급망 자체가 부족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과 중동 지역의 전쟁,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 차질 등이 겹치면서 세계 정유시장에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국제 원유가격이 안정되더라도 경유 공급 부족은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석유업계와 농업지역 사이 선택 압박

이번 경유 수출금지 논쟁은 트럼프 행정부가 직면한 에너지정책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미국의 석유·천연가스 생산 확대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고 석유업계 역시 트럼프의 규제완화 정책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경유 가격이 갤런당 6달러를 넘어 농민과 화물운송업계의 비용 부담이 급격히 커지면서 정치적 압력이 높아졌다. 로이터 분석에 따르면 이란전쟁 이후 지난 1년간 미국 경유 가격 상승률은 휘발유보다 훨씬 높았고, 물류와 농업 등 경제 전반에 부담을 주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 경유가격을 낮춰달라는 농업지역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요구와 수출시장을 보호해달라는 석유·정유업계의 요구 사이에서 정책 결정을 검토하고 있다.

아직 백악관이 구체적인 수출 제한 방식이나 기간을 공식 발표한 것은 없다.

특히 에너지장관까지 전면적인 수출금지에 반대 입장을 밝힌 만큼, 최종 조치가 전면 금지인지, 일정 기간·물량을 제한하는 방식인지, 아니면 실제 규제로 이어지지 않을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경유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수출 제한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그동안 석유업계가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고 봤던 '경유 수출금지'가 워싱턴의 주요 정책 선택지로 부상한 것은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