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30 10:00 AM
By 전재희
WSJ 조사, 약값·보육비·신용카드 금리 등에 정부 개입 요구 확산
카드금리 10% 상한 79% 지지...대형 기관투자가의 단독주택 대량매입 제한도 75%
강한 국경통제와 장기 불법체류자 시민권 경로도 동시에 지지
공화·민주 양당 모두 비호감 약 60%...기존 보수·진보 구분 흔드는 '생활비 정치' 부상
미국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넘어 생활비 문제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에서 처방약 가격과 신용카드 금리, 보육비 등에 상한을 설정하거나 대형 금융기관의 주택시장 진입을 제한하는 정책이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층 모두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동시에 강력한 국경통제를 요구하면서도 미국에서 장기간 생활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해온 불법체류자에게 시민권 취득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정책에도 폭넓은 지지가 나타났다.
WSJ은 이런 결과가 미국 정치에서 더 이상 '보수는 시장, 진보는 정부'라는 전통적인 구분만으로 유권자들의 정책 선호를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정책 가운데 하나는 신용카드 이자율을 연 10%로 제한하는 방안이다.
WSJ 조사에서 응답자의 79%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이 정책은 미국 정치에서 이례적인 조합의 지지를 받고 있다.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의원과 보수 성향의 조시 홀리(Josh Hawley)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미 신용카드 금리를 10%로 제한하는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신용카드 금리를 10%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홀리와 샌더스가 공동 발의한 법안은 10% 상한을 5년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 크게 다른 샌더스와 홀리, 트럼프가 같은 정책 방향에서 만나는 것은 최근 미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경제 포퓰리즘의 특징을 보여준다.
의료비 문제에서는 정부 개입 요구가 더욱 강했다.
처방약의 최고가격을 제한하는 정책은 전체 응답자의 87%가 지지했다.
의사가 처방한 의료서비스와 의약품을 건강보험사가 반드시 보장하도록 하는 방안도 88%의 지지를 받았다.
예상하지 못한 의료비 청구, 이른바 '서프라이즈 의료비'를 금지하는 방안 역시 90%의 지지를 얻었다.
정부가 할인된 처방약을 검색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방안에도 73%가 찬성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할인 처방약 정보를 제공하는 'TrumpRx'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맞벌이·근로 가정을 위해 보육비에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에도 74%가 찬성했다.
보육비 상한은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민주당 상원의원 등 진보진영에서 오랫동안 주장해온 정책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민주당 지지층에 국한되지 않고 공화당과 무당층에서도 상당한 지지가 나타났다.
이는 보육 문제를 전통적인 복지정책보다는 가계 생활비 문제로 받아들이는 유권자가 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거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임대료 인상폭을 물가상승률보다 최대 5%포인트 높은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안에 65%가 찬성했다.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단독주택을 대량 매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방안에는 75%가 찬성했다.
대형 사모펀드와 투자회사들이 주택을 대량으로 사들여 일반 가정과 경쟁하면서 집값과 임대료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불만이 미국에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WSJ은 올해 의회가 대형 기관투자가의 대규모 주택매입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았지만 법으로 시행됐다고 전했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 정책도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연소득 100만달러 이상 소득자에 대한 연방소득세율을 인상하는 방안에는 73%가 찬성했다.
순자산 10억달러 이상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연방 부유세를 도입하는 방안도 61%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뚜렷한 당파 차이도 나타났다. 민주당과 무당층에서는 부유층 증세에 대한 지지가 높았지만 공화당 지지층에서는 다수가 반대했다.
WSJ은 전체 유권자의 약 3분의 2가 연소득 100만달러 이상 고소득자의 세금을 올리는 데 찬성했지만 공화당 지지자 가운데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고 분석했다. 억만장자 부유세도 전체적으로는 약 60%가 찬성했지만 공화당에서는 약 3분의 1만 지지했다.
즉 생활비와 직접 연결되는 가격 규제에서는 초당적 지지가 강하지만 세금 문제에서는 기존의 당파적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민 문제에서도 기존의 좌우 구도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타났다.
조사에서는 불법 이민을 국경에서 차단해야 한다는 정책에 큰 다수가 찬성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장기간 생활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해온 불법체류자에게 시민권 취득 경로를 제공하는 방안에도 폭넓은 지지가 나타났다.
이는 유권자 상당수가 '국경을 강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미 미국 사회에 정착한 장기 체류자에게는 합법화 통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국경통제를, 민주당은 합법화 경로를 강조해왔지만 실제 유권자들의 선호는 두 정책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타난 것이다.
투표 때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제시하도록 하는 정책 역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WSJ 조사에서는 공화당과 무당층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의 절반 가까이도 유권자 신분증 확인을 지지했다.
다만 미국에서 유권자 신분확인 제도는 주마다 규정이 다르고, 비시민권자의 실제 투표 사례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중간선거를 앞두고 비시민권자 등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각 주의 유권자 명부 점검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부가 생활비와 의료비, 세금 문제에 개입하도록 하는 정책 대부분이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WSJ이 조사한 16개의 관련 정책 가운데 14개가 과반 지지를 받았고, 그중 10개는 약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이 같은 결과는 과거 미국 정치에서 가격통제나 기업활동 제한이 비교적 급진적인 정책으로 취급됐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WSJ은 과거 정부가 시장가격을 직접 제한하거나 기업활동을 규제해 소비자를 보호하는 정책은 주로 정치권의 이념적 주변부에서 논의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높은 주택가격과 의료비, 신용카드 이자, 보육비, 식료품비가 가계에 직접적인 부담을 주면서 정부 개입에 대한 거부감이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가 개입하면 무엇이든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유권자들은 정책의 내용에 따라 상당히 선택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부가 직접 할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방안이다.
뉴욕시의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 시장이 제안한 정부 운영 할인 식료품점과 유사한 정책에 대한 지지는 37%에 그쳤다.
반면 신용카드 금리 상한이나 처방약 가격 제한처럼 민간기업의 가격이나 활동을 규제하는 정책에는 높은 지지가 나타났다.
즉 미국 유권자들은 정부가 직접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대형 기업이나 금융회사에 제한을 두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정책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낮은 지지를 받은 정책 가운데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현금지급 방안이었다.
트럼프는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을 유지할 경우 성인 국민에게 5천달러씩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정책을 지지한 유권자는 23%에 불과했다.
정부가 생활비를 낮추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에는 높은 지지를 보내면서도 대규모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정책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WSJ은 16개 생활비·의료·세금 관련 정책 가운데 트럼프의 5천달러 지급안이 가장 낮은 지지를 받은 정책이라고 전했다.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어진 인플레이션이 미국 유권자들의 경제관을 바꿨다고 분석했다.
중도우파 성향 미국기업연구소(AEI)의 경제학자 마이클 스트레인(Michael Strain)은 과거 정치권에서 논의하기 어려웠던 정책들이 이제 주류 정치의 논의 대상이 됐다고 평가했다.
주택과 의료비, 교육비 등이 소득보다 빠르게 상승하면서 자유시장 원칙만으로 생활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유권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민주당 여론조사 전문가 존 앤잘론(John Anzalone)은 특히 주택가격과 경제적 이동성에 대한 좌절을 지적했다.
그는 집을 살 수 없거나 아무리 일해도 경제적으로 앞서갈 수 없다고 느끼면 과거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정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를 공동 진행한 공화당 여론조사 전문가 애덤 겔러(Adam Geller)는 높은 지지를 받은 정책들의 공통점을 '공정성'에서 찾았다.
그는 인기 있는 정책 대부분에서 소비자와 공정한 가격 사이에 대형 기관이나 기업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의료보험사, 제약회사, 카드회사, 대형 주택투자회사 등이 대표적이다.
겔러는 이를 기존의 보수 대 진보 문제가 아니라 유권자들이 공정한 가격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인식하는 대형 기관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포퓰리즘은 정부가 경제 전체를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 대형 기관이나 기업이 소비자보다 지나치게 우월한 협상력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 유권자들이 정부에 균형을 맞춰달라고 요구하는 성격에 가깝다.
이 같은 변화의 또 다른 배경은 양대 정당에 대한 불신이다.
WSJ 조사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유권자의 거의 60%가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 각각 40%에 미치지 못했다.
즉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이 기존 양당의 이념적 노선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민주당이 주장해온 가격규제 정책에 공화당 유권자가 동의할 수 있고, 공화당이 강조해온 강한 국경통제에 민주당 유권자가 동의할 수도 있다.
샌더스와 홀리가 신용카드 금리 상한에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트럼프가 전통적인 공화당의 자유시장 노선과 다른 금리 규제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변화의 한 사례다.
이번 조사를 실시한 앤잘론은 미국 정치를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포퓰리즘이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서 지배적인 이념으로 부상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트럼프 역시 2016년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 자유무역협정을 재협상하고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 삭감을 막겠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공화당 노선과 다른 경제 포퓰리즘을 내세웠다.
최근에는 민주당에서도 민주적 사회주의자와 경제적 포퓰리즘을 강조하는 후보들이 중도파 후보들을 누르고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높은 대중적 지지가 반드시 정책의 경제적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WSJ은 이번 조사에서 각 정책의 잠재적인 부작용을 응답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했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 금리를 10%로 제한하면 금융회사가 상환위험이 높은 저소득층에 대한 카드 발급을 줄일 수 있다.
건강보험사에 더 많은 의약품과 의료서비스 보장을 의무화하면 보험료가 오를 가능성도 있다.
임대료 인상 제한 역시 단기적으로 세입자를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신규 임대주택 공급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것은 이들 정책의 경제적 효과가 아니라, 현재 미국 유권자들이 어떤 종류의 정부 개입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선호다.
이러한 결과는 2026년 중간선거의 주요 쟁점이 전통적인 이념논쟁보다 생활비 문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권자들은 처방약과 신용카드 이자, 보육비, 임대료, 주택가격 등 일상생활에서 직접 체감하는 비용을 낮추는 정책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고유가와 높은 모기지 금리, 주택가격 부담이 계속되면서 생활비 문제는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중요한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WSJ의 최근 조사 역시 양당을 가로지르는 포퓰리즘적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가 이번 중간선거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미국 유권자들이 반드시 하나의 일관된 이념에 따라 정책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력한 국경통제와 불법체류자의 시민권 취득 경로를 동시에 지지할 수 있다.
기업 활동을 지지하면서도 신용카드 금리에는 상한을 요구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처방약 가격과 보육비를 제한하는 정책에는 찬성할 수 있다.
부유층 증세를 지지하면서도 대규모 정부 현금지급에는 반대할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조사는 미국 정치에서 기존의 '작은 정부 대 큰 정부', '시장 대 규제', '보수 대 진보'라는 전통적인 구분보다 생활비와 공정성에 대한 체감이 유권자의 정책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WSJ은 9월16일부터 21일까지 전국 등록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이번 조사를 실시했으며 전체 표본의 오차범위는 ±2.5%포인트다.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양당이 직면한 과제는 이념적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의료비·주거비·신용카드 이자·보육비 부담에 어떤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하느냐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