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5 07:43 AM
By 전재희
치솟는 임대료·주택가격에 민심 폭발...산체스 "더 큰 진보 다수파 필요"
세입자 보호법 의회서 부결되자 조기총선 선언...우파 PP·복스 연정 가능성 우세
스페인 집값 1년 새 13% 가까이 상승...젊은층 월세는 평균 임금 대부분 잠식
이민·부패 의혹·트럼프와 갈등까지 겹쳐...8년 집권 산체스의 정치생명 건 승부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총리가 치솟는 임대료와 주택가격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정치적 반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 조기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산체스 총리는 5일 TV 연설을 통해 오는 11월29일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2023년부터 좌파 소수정부를 이끌어온 그는 이번 선거를 "더 큰 진보적 다수파를 확보할 것인지, 아니면 스페인이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독재자 사망 이후 가장 오른쪽으로 기운 정부를 맞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택이라고 규정했다.
산체스는 "극우의 물결에 합류해 그들이 집권하는 곳마다 사회적 진전을 되돌릴 것인지, 아니면 스페인이 개방성과 사회정의, 환경적 책임의 보루로 계속 남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여론조사만 보면 산체스의 승부는 상당히 위험하다.
대부분 조사에서는 중도우파 국민당(PP)이 제1당이 되고, 강경 반이민 성향의 복스(Vox)와 연립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나리오로 나타나고 있다. 로이터 역시 국민당과 복스의 연대가 현재 가장 유력한 결과라고 전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스페인의 주택위기였다.
산체스 정부는 최근 임대료 급등과 강제퇴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세입자 보호를 강화하는 긴급대책을 의회에 제출했다.
대책에는 취약계층 세입자에 대한 강제퇴거 제한을 2030년까지 연장하고, 기존 임대계약의 임대료 동결 기간을 추가 연장하며, 단기 임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다른 법안은 일정 조건에서 임대계약을 자동 연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법안 모두 의회에서 부결됐다.
야당인 국민당뿐 아니라 그동안 산체스 정부의 일부 법안을 지지해온 카탈루냐 분리주의 정당 훈츠(Junts)까지 반대표를 던졌다.
훈츠 측은 지나친 임대시장 규제가 오히려 집주인들의 임대주택 공급을 줄여 주택부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체스는 법안 부결 직후 조기총선을 선택했다.
로이터는 이를 주택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적 의제를 다시 설정하고, 이민과 부패 의혹 등 정부에 불리한 이슈에서 벗어나려는 고위험 정치적 승부로 평가했다.
스페인의 주택위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계기 가운데 하나는 지난달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87세 여성의 강제퇴거였다.
WSJ에 따르면 이 여성은 프랑코 시대부터 유지돼온 임대료 규제가 적용된 부모의 임대주택 권리를 물려받아 오랫동안 거주해왔다.
그러나 투자회사가 해당 건물을 매입한 뒤 임대료가 크게 오르면서 더 이상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
퇴거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면서 주택문제는 단숨에 스페인 정치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젊은 세입자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확산됐고 마드리드에서는 시위대가 텐트를 설치하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10월3일에는 스페인 약 50개 도시에서 주거비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로이터에 따르면 마드리드에서만 약 7만명이 거리로 나왔다.
의회가 주택대책을 부결하자 시위대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의회 밖에 모인 시민들은 "당신들의 이익이 우리의 고통"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세입자단체들은 법안 부결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하겠다며 노동조합과 협의해 총파업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스페인 청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평균 월세는 약 1,176유로로, 스페인 청년 평균 급여의 98.7%에 해당한다.
청년이 월급 대부분을 월세로 지불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상당수 젊은 스페인인들이 30세가 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주택구입도 쉽지 않다.
WSJ은 스페인의 주택가격이 최근 1년 동안 약 13% 가까이 상승했으며 임금 상승률의 약 세 배 수준이라고 전했다.
스페인 국가통계청(INE)의 공식 자료에서도 올해 2분기 전국 주택가격은 전년 동기보다 12.2% 상승했다.
특히 기존주택 가격 상승률은 12.9%에 달했다.
포르투갈도 비슷한 상황이다.
WSJ에 따르면 포르투갈 주거비용은 6월까지 1년 동안 16.5% 상승했다.
이처럼 주거비 급등은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유럽 주요 도시 전체의 사회·정치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바르셀로나와 리스본 등에서는 관광객 증가가 현지 주민의 주택난을 악화시킨다는 불만이 커지면서 반관광 시위도 이어졌다.
주택가격이 급등한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급부족이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전국적으로 약 70만채의 주택이 부족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일자리와 인구가 몰리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대도시의 공급부족이 심각하다.
이민자 증가와 관광산업 확대, 지방에서 대도시로 이동하는 인구, 1~2인 가구 증가로 주택수요는 빠르게 늘었지만 건설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일부 지역의 복잡한 건축규제와 임대시장 규제도 새로운 주택공급을 제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산체스 정부의 임대료 규제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주택공급을 더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 의원 후안 브라보(Juan Bravo)는 "주택은 법령으로 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지어서 싸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체스는 조기총선을 통해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깨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TV 연설에서 "국민의 지지를 새롭게 받아야 한다"며 "기득권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진전을 이룰 수 있는 훨씬 더 큰 진보적 다수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체스 정부는 현재 350석 의회에서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연립정부와 우호 정당을 합쳐도 확실한 다수파가 아니기 때문에 주요 법안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 정당들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로이터에 따르면 산체스 정부의 핵심 연정 세력은 350석 가운데 147석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훈츠까지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주요 정책을 통과시키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정치적 교착은 이미 국정운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체스 정부는 2023년 이후 새로운 국가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했다.
경제 자체는 유럽 주요 국가 가운데 비교적 강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부가 의회에서 안정적인 입법 다수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개혁정책 추진은 계속 막혀왔다.
산체스는 결국 남은 임기를 소수정부로 끌고 가기보다 총선을 통해 새로운 다수파를 확보하는 쪽을 선택했다.
야당은 즉각 환영했다.
국민당 대표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Alberto Núñez Feijóo)는 산체스의 발표 이후 "마침내 스페인 국민이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민당은 2023년 총선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연립정부를 구성할 파트너를 확보하지 못해 집권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복스가 국민당과 연정에 참여할 경우 두 정당이 의회 과반을 확보할 가능성이 여론조사에서 제기되고 있다.
실제 그렇게 된다면 프랑코 독재 종식 이후 스페인 중앙정부에 극우 정당이 처음으로 직접 참여하게 되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된다.
산체스는 최근 몇 년 사이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주요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 좌파가 이끄는 정부는 크게 줄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당이 여론조사 선두권까지 올라왔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도 우파 정당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스페인 총선은 단순한 국내 선거를 넘어 유럽 정치의 우경화 흐름이 어디까지 확대될지를 보여주는 시험대라는 평가도 나온다.
산체스는 이런 구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이번 선거를 단순히 집값이나 경제 문제를 선택하는 선거가 아니라 스페인이 유럽의 우경화 흐름에 동참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거로 규정하고 있다.
산체스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도 여러 현안에서 충돌해왔다.
그는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지중해 연안의 미·스페인 공동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와 레바논 군사작전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상대적으로 강한 스페인 국내에서는 이런 외교정책이 산체스의 지지율 회복에 일부 도움이 됐지만 미국과의 외교관계에는 긴장을 초래했다.
산체스는 미국이 요구한 국내총생산 대비 5% 수준의 국방비 증액 요구에도 반대해왔다. 로이터는 이 문제와 중국에 대한 스페인의 접근이 트럼프 행정부 및 일부 유럽 국가들과 갈등을 빚어왔다고 전했다.
산체스의 최근 정치적 메시지에서 주거비 문제는 국제적인 진보정치 의제로도 확대되고 있다.
WSJ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뉴욕을 방문해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 뉴욕시장과 그레이시 맨션에서 긴 조찬을 가졌다.
두 사람은 생활비와 주거비 상승 문제,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산체스는 당시 공개된 영상에서 맘다니에게 "좌파라는 것은 큰 승부를 거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한 달 뒤 산체스 자신이 조기총선이라는 최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주택문제가 산체스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면 이민은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다.
올여름 수천명의 아프리카 이주민들이 모로코에서 스페인의 북아프리카 영토 세우타(Ceuta)로 넘어오면서 대규모 이민위기가 발생했다.
야당은 산체스 정부가 국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산체스는 이민자가 스페인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건설과 농업, 관광·호텔업 등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이 보충하고 있으며 고령화가 진행되는 스페인의 복지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노동인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대규모 인구유입이 주택수요를 더욱 증가시켜 현재의 주택부족을 악화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산체스에게는 부패 의혹도 큰 부담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가족과 사회당 고위 관계자, 정부 인사들을 둘러싼 각종 비위 의혹이 제기돼왔다.
당사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로이터는 사회당 지지율이 산체스 집권기간 상당 부분에서 26~31% 수준에 머물렀으며 최근의 여러 의혹이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키웠다고 전했다.
야권은 산체스가 주택문제를 명분으로 조기총선을 실시하지만 실제로는 부패와 이민 문제에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산체스를 쉽게 과소평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2018년 국민당의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 정부를 불신임투표로 무너뜨리고 총리가 됐다.
이후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와 선거 패배 전망을 극복하며 총리직을 유지했다.
2023년 총선에서도 국민당보다 적은 의석을 얻었지만 좌파와 지역 분리주의 정당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묶어 다시 정부를 구성했다.
카탈루냐 분리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사면을 약속하면서 의회 지지를 확보한 결정은 스페인 사회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재집권에 성공했다.
로이터는 산체스가 여러 차례 정치적 사망선고를 뒤집어온 대표적인 정치적 생존자라고 평가했다.
결국 산체스의 이번 승부는 하나의 계산에 기반하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사회당이 패배하고 국민당·복스 우파연정이 출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거비 급등에 대한 분노가 계속 확대되고, 유권자들이 주택대책을 막은 야당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산체스가 좌파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킬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최근 주택 시위대 사이에서는 정부의 세입자 보호정책에 긍정적인 반응도 나타났다. 로이터는 의회에서 부결된 정부 대책이 시위 참가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산체스로서는 이 분노가 식기 전에 선거를 치르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총선의 선택지는 상당히 선명하다.
산체스와 사회당은 세입자 보호와 복지 확대, 비교적 개방적인 이민정책과 진보적인 사회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국민당과 복스는 규제완화를 통한 주택공급 확대와 강경한 이민정책, 보다 보수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이 승리하더라도 단독 과반 확보가 어렵다면 복스와 손을 잡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 스페인은 1975년 프랑코 사망과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강경 우파 정당이 중앙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시대를 맞을 수 있다.
반대로 산체스가 또다시 예상을 뒤집는다면 그는 유럽 전역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스페인을 좌파정부의 주요 거점으로 계속 유지하게 된다.
산체스가 이번 선거를 통해 던진 질문은 결국 간단하다.
치솟는 집값과 임대료에 분노한 스페인 국민들이 해결책을 더 강한 정부 개입에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주택공급 확대와 보수정부로의 정권교체에서 찾을 것인지다.
11월29일 조기총선은 산체스 총리의 정치적 생존뿐 아니라 스페인이 앞으로 유럽의 좌파 거점으로 남을지, 아니면 대륙 전반의 우경화 흐름에 합류할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