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7 08:50 AM
By 전재희
코슬라 벤처스 비서실장 채용에 오전 8시~오후 8시 출근·야간·주말 대기 요구
"예측 가능한 근무시간 원하면 지원하지 말라"...AI 스타트업들 '9-9-6' 근무문화까지 공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하루 12시간 근무와 사실상 24시간 대기를 요구하는 채용 공고가 등장했다. 인공지능(AI)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거에는 기업 내부에서 암묵적으로 요구되던 초고강도 근무가 이제는 아예 채용 단계부터 공개적으로 제시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유명 벤처캐피털 코슬라 벤처스(Khosla Ventures)의 창업자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의 비서실장(Chief of Staff) 채용이다. 지원자는 사무실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밤과 주말을 포함해 '24시간 내내' 연락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생활을 3년간 지속하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코슬라 벤처스의 인재담당 부사장 라이언 바트라(Ryan Batra)는 링크드인에 올린 채용공고에서 조건을 매우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예측 가능한 근무시간이나 정해진 업무 매뉴얼, 잦은 지시가 필요하다면 이 자리는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적었다.
코슬라 벤처스는 OpenAI와 Stripe, DoorDash 등에 초기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벤처투자회사다.
이번 채용공고는 공개되자마자 큰 논쟁을 불러왔다. 일부에서는 젊은 인재가 세계적인 투자자의 의사결정을 바로 옆에서 배울 수 있는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평가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사실상 지나친 노동을 요구하는 자리라고 비판했다.
수면기술 스타트업 Eight Sleep의 공동창업자 마테오 프란체스케티(Matteo Franceschetti)는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면 직접 지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Reddit 공동창업자 알렉시스 오헤이니언(Alexis Ohanian)도 코슬라와 함께 일하는 경험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리콘밸리는 오래전부터 장시간 노동과 치열한 업무문화로 유명했다.
그러나 AI 붐 이후에는 이러한 문화가 한 단계 더 강해지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과거에는 과도한 근무시간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이를 자랑하거나 채용공고에 직접 명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대에서 첨단기술 경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마거릿 오마라(Margaret O'Mara) 교수는 이를 두고 "그동안 말하지 않던 부분을 이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젊은 AI 스타트업 창업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9-9-6' 근무 방식도 확산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주일에 6일을 일한다는 의미다.
일부 스타트업은 채용 과정 자체에서도 지원자의 체력과 업무강도를 시험하고 있다.
보험 스타트업 Corgi는 일부 지원자들에게 며칠간 실제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실전 테스트를 요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주말까지 포함된다.
스타트업 LemonLime은 올해 초 네트워킹 행사에서 회사 문신을 새길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면접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문신을 했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사례들이 등장하면서 AI 시대 스타트업들이 단순히 능력뿐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채용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코슬라의 채용공고가 현재 미국의 고용시장 상황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구직자에게 유리했던 몇 년 전과 달리 최근 기술업계 채용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기업이 훨씬 강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기업 컨설팅업체 Group 360 Consulting의 라힐라 안와르(Raheela Anwar) 최고경영자는 현재와 같은 고용시장 상황이기 때문에 코슬라가 이런 조건의 인재를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노동시장이 더 활발했다면 이런 능력을 가진 지원자들은 훨씬 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원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현재 업무조건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안와르는 "매력적인 것은 그 직업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에 얻게 될 기회"라고 말했다.
기업 최고경영자나 창업자 바로 옆에서 일하는 비서실장 자리는 오래전부터 고위 경영직으로 올라가는 빠른 통로로 평가돼왔다.
업무는 매우 광범위하다. 경영진 회의에 참석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단순 실무부터 회사의 장기 전략과 투자 결정을 검토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많은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외부 인사보다 이미 조직을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내부 인사를 비서실장으로 선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코슬라의 비서실장 채용공고 역시 단순한 일정관리나 행정보조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채용된 사람은 코슬라의 '사고 파트너(thought partner)'로서 신규 투자 가능성을 평가하고, 포트폴리오 기업들과 협력하며,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코슬라는 X를 통해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에게 모든 분야의 전문지식을 처음부터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일하는 모든 분야를 알 필요는 없다"며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어떤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제1원칙(first principles)'에서 생각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코슬라가 원하는 인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과 기술을 빠르게 이해하고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7signals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제이슨 프리드(Jason Fried)는 실리콘밸리의 과도한 장시간 근무문화에 비판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코슬라의 이번 채용공고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프리드는 채용조건과 기대수준이 처음부터 매우 명확하게 공개돼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내가 25살이었다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즉 근무조건이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지원자가 그 조건을 충분히 알고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경력투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문제는 이 정도의 근무강도에 상응하는 보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코슬라 벤처스는 해당 채용공고에 급여 범위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원자는 상당히 몰릴 것으로 보인다. 회사 대변인은 초기 반응을 기준으로 1,000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코슬라는 16일 늦게 X에 다시 글을 올려 처음 공개된 채용조건에 대해 일부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농담은 제쳐두고 솔직히 말하면 이 직업에 특정한 근무시간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업무강도 자체는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이어 "나는 주당 80시간을 일하고 있으며 이 사람도 나를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슬라 밑에서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인사들은 경험 자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스타트업 창업자이자 스탠퍼드대 겸임교수인 헤삼 모틀라그(Hesam Motlagh)는 링크드인에 "이 경험이 얼마나 놀라운 학습 기회인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고 썼다.
그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직접 코슬라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결국 이번 채용공고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한 억만장자 투자자의 까다로운 인재채용 방식만은 아니다.
AI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실리콘밸리에서는 높은 보상이나 빠른 경력성장의 가능성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극단적인 근무강도를 요구하는 기업들이 다시 늘고 있으며, 과거에는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허슬 문화'가 이제 채용공고에까지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