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9 09:27 AM
By 전재희
공개기업 전환해도 일반 주주 영향력 제한 가능성...7명 이사회 중 4명 선임권 보유
벤 버냉키 포함 신탁, 회사 매각·대규모 부채·AI 모델 이전에도 사실상 제동 가능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Anthropic)이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는 가운데, 회사의 경영과 주요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비공개 신탁구조가 투자자들의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최근 기관투자자들을 상대로 빠르게 증가하는 매출과 기술 발전을 강조하며 IPO 준비에 나섰다. 회사는 또 전체 주식의 5%를 별도 기금에 넣어 비영리단체 기부나 회사의 장기적 사명을 지원하는 데 활용하는 방안도 공개했다.
그러나 앤트로픽의 지배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Long-Term Benefit Trust'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다.
Long-Term Benefit Trust의 가장 강력한 권한은 앤트로픽 이사회 구성에 대한 영향력이다.
현재 앤트로픽 이사회는 7명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최대 4명을 신탁이 직접 선임할 수 있다. 신탁은 이들을 별도의 사유 없이 해임할 수도 있다.
즉 신탁이 이사회 과반을 사실상 통제할 수 있는 구조다.
신탁의 공식 목적은 앤트로픽이 AI를 인류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개발하도록 회사의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앤트로픽은 처음 5명의 신탁위원을 직접 지명했다.
현재 신탁위원 가운데에는 벤 버냉키(Ben Bernanke)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 클린턴헬스액세스이니셔티브(CHAI)의 닐 버디 샤(Neil Buddy Shah) 회장이 포함돼 있다.
샤가 현재 신탁 의장을 맡고 있다.
현재 신탁위원 자리 가운데 2석은 공석이다. 앤트로픽은 앞으로 결원이 발생할 경우 회사와 협의는 해야 하지만 최종적인 신탁위원 충원권은 신탁 자체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앤트로픽은 신탁위원들이 회사의 재무적 성공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지 않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신탁위원들은 앤트로픽 주식을 보유하지 않으며 회사의 이익을 배분받지도 않는다.
회사는 지난 7월 신탁위원들이 "시간과 서비스에 대한 보상만 받는다"고 밝혔다.
이는 주가와 기업가치가 상승할수록 경제적 이익을 얻는 일반 주주나 경영진과 다른 이해관계를 갖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신탁은 일반적인 주주총회 안건에 직접 투표하지는 않지만, 회사의 주요 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앤트로픽의 법률자문단이 2023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회사는 일정한 중요 사안에 대해 신탁위원들과 사전 협의를 해야 한다.
회사가 일상적 수준을 넘어서는 부채를 발행하거나, 회사의 절반 이상을 매각하거나, 특정 기준을 넘어서는 AI 모델의 통제권을 이전할 경우 최소 5일 전에 신탁에 이를 통보해야 한다.
AI 모델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기준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앤트로픽 이사회가 분기마다 이를 업데이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구조가 신탁에 사실상의 거부권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탁이 어떤 거래를 직접 법적으로 거부할 권한이 없더라도, 이사회 과반을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탁이 반대하는 대규모 거래를 이사회가 추진할 경우 이사진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이를 막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앤트로픽 측은 사전 통보 조항이 신탁에 공식적인 거부권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추가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장기업에서는 주주가 이사 선임 등을 통해 회사의 주요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앤트로픽은 일반 기업과 구조가 다르다.
회사는 '공익법인(Public Benefit Corporation·PBC)'으로 설립돼 있으며, 주주이익뿐 아니라 회사가 설정한 공익 목적도 함께 고려하도록 돼 있다.
앤트로픽의 공익 목적은 AI를 인류의 이익을 위해 발전시키는 것이다.
공익법인 구조 자체가 앤트로픽만의 독특한 제도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15년 동안 PBC가 점차 확산됐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환경적 목표가 단기적인 주주이익과 충돌할 경우 이사회가 주주소송 위험 없이 공익 목적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활용됐다.
델라웨어주 법에 따르면 PBC 이사진은 주주의 이익뿐 아니라 기업활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이익과 회사가 설정한 공익 목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텍사스대 법학과 옌스 담만(Jens Dammann)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 증시에 상장된 PBC는 17개였다.
온라인 안경업체 Warby Parker와 클라우드 소프트웨어기업 Veeva Systems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앤트로픽의 가장 독특한 점은 PBC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별도의 신탁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담만 교수는 일반적인 공익법인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공익 목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사회는 결국 주주들이 선출하고, 주주들은 회사가 공익보다 이익극대화에 집중할 경우 경제적으로 더 큰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앤트로픽은 이 문제를 신탁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회사는 Long-Term Benefit Trust가 앤트로픽을 회사의 본래 사명에 묶어두고, 주주의 재무적 이해관계와 회사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앤트로픽의 최대 경쟁사인 OpenAI 역시 공익법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OpenAI는 신탁이 아닌 델라웨어 비영리기관 OpenAI Foundation의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두 회사 모두 일반적인 상장기업과 다른 지배구조를 선택했지만 회사에 대한 최종 통제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대형 기술기업들이 일반 주주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SpaceX는 지난 6월 IPO를 통해 860억달러를 조달했지만 창업자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Alphabet과 Meta Platforms 역시 복수의결권 주식을 이용해 창업자와 일부 경영진이 일반 주주보다 훨씬 강력한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앤트로픽은 창업자나 경영진이 아니라 공익 목적을 가진 별도의 신탁이 지배구조의 핵심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콜로라도대 법학과 앤 리프턴(Ann Lipton) 교수는 현재 구조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앤트로픽 IPO에 참여하는 일반 주주들이 갖게 될 경영 참여권은 매우 제한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상장 이후에도 신탁이 이사회의 다수를 선임하고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이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평가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앤트로픽은 현재 IPO에 대한 투자자 수요를 파악하는 과정에 있으며, WSJ는 앞서 회사가 최대 1,000억달러를 조달하고 약 2조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IPO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가장 불분명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향후 주주들이 신탁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지 여부다.
앤트로픽은 2023년 자사 웹사이트에서 충분히 큰 규모의 주주 '초다수(supermajority)'가 동의할 경우 신탁위원들의 동의 없이도 신탁의 권한을 변경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주주동의가 필요한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또 이 권한이 특정 상황에서만 행사 가능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앤트로픽의 최신 정관은 오히려 신탁 권한을 제거하거나 약화하기 위해 신탁 자체의 동의가 필요한 구조를 담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이사회 4분의 3의 찬성이 필요하며, 주주동의 비율도 최대 85%까지 요구될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기업지배구조 변경보다 훨씬 높은 장벽이다.
신탁의 권한을 제한하는 별도 조항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신탁 자체의 운영문서와 앤트로픽과 신탁 사이의 계약은 현재 공개돼 있지 않다.
앤트로픽의 IPO가 실제 진행될 경우 투자자들이 가장 주의 깊게 들여다볼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 신탁의 권한과 작동방식이 될 전망이다.
AI 기술과 매출 성장에 투자하는 일반 주주들이 막대한 자본을 제공하더라도 회사의 핵심 전략과 이사회 구성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앤트로픽 입장에서는 바로 그 제한이 회사의 장기적인 AI 안전·공익 목표를 단기적인 주가와 이익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핵심 장치다.
결국 앤트로픽 IPO의 중요한 쟁점은 단순히 회사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얼마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느냐뿐 아니라, 상장 이후에도 "회사의 최종 방향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