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0 07:38 AM
By 전재희
전국 폭동에 마크롱 정부 통제력 논란...르펜, '질서·치안 회복' 전면에
극좌 멜랑숑도 시위 지지로 존재감 확대...프랑스 대선 구도 양극화 조짐
프랑스 전역을 휩쓴 대규모 폭동이 정치권을 뒤흔드는 가운데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혼란 속에서 '질서를 회복할 지도자'를 자처하며 차기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청이 공격받고 수천 곳의 상점이 약탈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오랫동안 이민과 치안 문제를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아온 르펜이 이번 위기를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와 연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펜은 이번 주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을 연상시키는 형식의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다. 책장이 놓인 집무실 형태의 공간에 앉아 프랑스 삼색기를 옆에 둔 채, 현재의 폭동을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의 국가 통제력 위기로 규정했다.
르펜은 영상에서 "우리나라는 폭력과 무기력 사이에 끼여 인질로 잡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6개월 뒤 프랑스 국민은 다른 길, 즉 권위와 안전이 회복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의 치안 대응 실패와 자신이 주장해온 강경한 법질서 정책을 대비시키면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한 것이다.
프랑스 여론조사업체 Ipsos Bva의 아델라이드 줄피카르파시치(Adélaïde Zulfikarpasic)는 르펜의 영상 연출에 대해 "마치 이미 엘리제궁의 집무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르펜이 오랫동안 치안과 질서 문제를 강조해왔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이 커질수록 자신을 안정의 보증인으로 제시하기 쉬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줄피카르파시치는 현재 프랑스 사회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가 국가에 대한 신뢰 약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잃고 있다"며 르펜이 바로 이러한 인식과 자신을 대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폭동에서는 파리와 마르세유, 리옹, 리모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관공서가 공격받고 상점 수천 곳이 파손되거나 약탈됐다.
마크롱 정부는 폭동 진압을 위해 수만명의 경찰을 동원했지만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발생한 폭력사태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결국 파리 등 일부 지역에 부분적인 야간통행금지 조치까지 도입했다.
이번 사태에서는 극좌 성향 장뤼크 멜랑숑(Jean-Luc Mélenchon)의 존재감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멜랑숑은 거리로 나온 시위대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정부의 진압방식을 비판했고, 이 과정에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WSJ는 멜랑숑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중도·기성 정치권 후보들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당 계열 대통령 후보 라파엘 글뤽스만(Raphaël Glucksmann)은 멜랑숑을 향해 "극우로 가는 디딤돌"이라고 비판하며 "이 혼란으로 르펜보다 더 큰 혜택을 얻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프랑스 정치가 마크롱 시대의 중도구도에서 르펜과 멜랑숑을 양극으로 하는 정치적 대립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놓고 논쟁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르펜은 이전 대통령선거에서도 1차 투표를 앞두고 높은 지지를 기록한 적이 여러 차례 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는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르펜의 집권을 막기 위해 마크롱에게 표를 몰아주는 이른바 '공화국 전선'이 형성되면서 패배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마크롱 대통령은 연임 제한으로 다음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 결선에서 르펜과 맞붙었던 가장 강력한 중도 후보가 사라진 상태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WSJ는 이 같은 변화가 르펜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을 과거와 다르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르펜의 현재 위치는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RN)의 역사와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다.
르펜이 아버지 장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으로부터 물려받은 정당은 오랫동안 프랑스 정치권에서 위험한 반체제 세력으로 간주됐다.
장마리 르펜은 홀로코스트를 축소하는 발언을 반복해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결국 2015년 딸에 의해 당에서 축출됐다.
마린 르펜 역시 2017년 처음 마크롱과 대통령선거에서 맞붙을 당시 프랑스를 유로화 체제에서 탈퇴시키겠다는 정책을 제시해 경제계와 유권자들의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약 10년 동안 국민연합은 기존의 급진적 이미지를 완화하는 전략을 추진했고, 르펜은 특히 이민과 치안, 구매력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왔다.
이번 폭동에서는 오히려 르펜이 자신을 '질서와 안정'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역할이 뒤바뀐 모습이다.
경제문제에서도 정치적 역할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르펜의 경제정책이 금융시장의 주요 불안요인으로 지적됐지만 현재는 마크롱 정부가 프랑스 재정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를 진정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프랑스 정부는 수년 동안 국내총생산(GDP)의 5%를 넘는 재정적자를 기록했고 국가부채는 GDP의 약 120%에 접근했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정치적 불안으로 국채금리가 상승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르펜과 국민연합 역시 현재의 재정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국민연합은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재정적자를 줄이려 했던 마크롱 정부의 총리 두 명을 축출하는 데 표를 던졌다.
르펜은 동시에 프랑스의 정년을 경우에 따라 60세까지 낮추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정부의 연금지출이 늘어나면서 연간 재정적자에 수십억유로의 추가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재정건전성만 놓고 보면 르펜 역시 마크롱 정부를 비판하는 동시에 상당한 추가지출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WSJ는 최근 프랑스 정치에서 이러한 경제정책 논쟁이 폭동과 치안위기에 가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프랑스의 혼란은 당초 학교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교사 부족과 과밀학급, 열악한 학교시설 문제 등을 제기했지만 이후 생활비 상승과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 공공서비스 악화에 대한 불만이 결합하면서 시위 규모가 급격하게 확대됐다.
평화적인 대중시위 주변에서는 복면을 쓴 집단이 관공서와 상점, 경찰을 공격하면서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했다.
주말 동안 전국에서 3,000곳이 넘는 상점이 파손되거나 약탈됐고 2,000명 이상이 구금됐다. 이후 체포·구금 인원은 약 2,400~2,500명 수준까지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의 치안대응 실패 논란이 확산되면서 로랑 뉘녜(Laurent Nuñez) 내무장관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마크롱은 경찰과 치안당국의 지휘체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는 이후 파리와 니스 등 주요 도시의 폭동 집중지역에 부분 통행금지를 도입하고 약탈 대응을 위한 새로운 경찰작전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르펜은 이번 사태를 자신의 대표적인 정치의제인 이민정책과도 연결하고 있다.
그는 이번 폭력이 극좌 정치활동가들과 프랑스 대도시 외곽의 저소득 지역인 방리외(banlieues)의 일부 청년 범죄집단이 결합하면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방리외에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및 그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프랑스 무슬림 인구 상당수도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줄피카르파시치는 약탈 장면들이 특정 지역의 젊은층, 그 가운데 일부 이민자 배경을 가진 청년들에게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며 이러한 문제가 국민연합이 오랫동안 강조해온 핵심 정치의제와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폭동 참가자 전체를 이민자나 방리외 주민으로 규정할 근거는 없으며, 프랑스 정부는 조직된 극좌세력과 폭력집단, 혼란을 틈탄 범죄자들을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AP도 프랑스 정부가 극좌세력의 개입을 지적하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극좌 조직만으로 전국적인 폭동의 전체 규모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유라시아그룹(Eurasia Group)의 유럽 담당 책임자 무즈타바 라만(Mujtaba Rahman)은 주말의 사회불안이 르펜의 정치적 메시지와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르펜이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국민연합이 위험한 선택이 아니라 현재의 혼란을 만들어낸 기존 정치세력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즉 과거 선거에서는 르펜 집권 가능성 자체가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이번에는 국가재정과 치안, 거리폭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기존 정치체제를 위험요인으로 규정하려는 전략이다.
르펜에게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중대한 법적 문제도 남아 있다.
르펜은 유럽의회 자금을 국민연합 당직자 인건비 등에 부당하게 사용한 혐의로 2025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올해 7월 파리 항소법원은 유죄판결을 유지하면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 가운데 2년은 집행유예이고 나머지 1년은 전자발찌를 착용한 자택구금 방식으로 집행하도록 했다.
다만 법원은 공직 출마 제한 기간을 줄였고 르펜은 곧바로 2027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 뒤 프랑스 최고법원인 파기원에 다시 상고했다. 상고가 진행되는 동안 형 집행과 전자발찌 착용 의무는 정지된 상태다.
불과 몇 달 전까지 프랑스 대통령선거의 중심에는 재정적자와 연금, 세금, 유럽연합 정책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폭동 이후 치안과 이민, 국가 권위와 공공질서가 선거의 핵심 의제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르펜은 바로 이 분야를 지난 10여년간 자신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아왔다. 반면 마크롱 정부는 재정난 때문에 시위대가 요구하는 대규모 추가지출을 제공하기 어렵고, 동시에 거리의 폭력까지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마크롱은 다시 출마할 수 없고 중도진영에서는 아직 그를 대체할 확실한 정치적 중심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좌파에서는 멜랑숑이 거리시위와 함께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프랑스 폭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번 사태가 내년 대통령선거의 정치적 의제를 크게 바꾸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르펜은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을 혼란 이후의 '질서와 안정'을 대표하는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