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9 08:48 AM
By 전재희
EU "최소 72시간 스스로 버틸 준비"...독일 10일·스웨덴 1주일 권고
영국도 10월 새 전국 캠페인 시작...미국 일부 지역은 최대 30일 자립 준비
전쟁·사이버공격·대규모 정전·기후재난까지 대비하는 '가정 단위 민방위' 확산
유럽 각국이 국민들에게 식량과 식수, 의약품, 현금, 라디오 등 필수 생필품을 가정에 미리 준비하도록 권고하는 움직임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단순한 자연재해 대비를 넘어 전쟁과 사이버공격, 대규모 정전, 통신망 마비와 공급망 붕괴까지 대비하는 새로운 민방위 체계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미국에서도 연방정부가 최소 며칠 동안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비상용품 준비를 권고하는 가운데 일부 주정부는 주민들에게 훨씬 장기간의 자립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다. 네바다주는 최근 재난 발생 시 최대 30일까지 가족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비상계획과 물품을 준비하라는 지침을 운영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Preparedness Union Strategy'를 통해 주민들이 비상사태 발생 후 최소 72시간 동안 외부 지원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 비상식량과 식수, 의약품 등 필수물품을 가정에 준비하고 초기 위기 상황에서 공공기관의 도움 없이 일정 기간 버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EU가 대비 대상으로 제시한 위험은 자연재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정학적 긴장과 군사충돌, 사이버공격, 외국의 정보조작, 기후변화, 보건위기와 중요 인프라 장애까지 폭넓게 포함돼 있다.
EU는 이를 '올해저드(All-Hazards)'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종류의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개인과 기업, 정부기관과 군이 함께 대응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영국으로도 확대됐다.
영국 정부는 10월 22일 전국적인 'Be Ready' 캠페인을 시작하고 각 가정이 최소 3일 동안 주요 서비스가 중단되는 상황에 대비하도록 권고했다. 이번 캠페인은 앞으로 3년 동안 계속되는 국가 차원의 국민 비상대비 프로그램이다.
영국 정부는 식수가 끊기거나 전기가 나가고 인터넷과 전화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가정에는 3일분의 생수와 장기보관이 가능한 식품을 비롯해 손전등과 여분의 배터리, 충전식 보조배터리, FM 라디오, 현금, 중요 신분증 사본, 구급용품과 필수 의약품을 준비하도록 권고했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이미 비슷한 국민 대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이번 정책을 유럽의 민방위 흐름과 연계했다.
독일의 권고기간은 훨씬 길다.
독일 연방시민보호재난지원청(BBK)은 국민들에게 가능하면 10일 동안 외부 지원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식량과 음료를 비축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당장 10일치를 준비하기 어렵다면 최소 3일분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늘리도록 안내한다.
독일 정부가 제시하는 비상상황에는 홍수와 폭설, 정전 등 기존 재난뿐 아니라 최근에는 전쟁과 하이브리드 위협, 에너지 부족, 허위정보까지 포함됐다.
BBK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많은 독일 국민이 전쟁과 민방위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요구하면서 새로운 비상대비 지침에 전쟁 관련 내용을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스웨덴은 유럽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민간 비상대비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스웨덴 정부는 일반 시민이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최소 1주일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공공서비스 수준이 평상시보다 크게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 국민의 비율이 높아야 사회 전체의 방어력이 강화된다고 설명한다.
정부는 'In Case of Crisis or War'라는 국민 안내서를 새롭게 배포하면서 전기와 식수, 식료품 공급이 중단될 경우에 대비할 것을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올해 9월 '안보 공급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이들 국가는 평시의 대형 재난뿐 아니라 안보위기와 전쟁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식량과 필수 물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생산과 물류, 유통과 무역체계를 공동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유럽의 비상대비가 개인의 비상식량 준비에서 국가간 공급망 확보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민방위 협력은 국경을 넘는 대규모 주민 이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독일,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노르웨이, 폴란드는 올해 3월 위기 또는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을 다른 국가로 일시 대피시키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국경통과와 교통, 대피통로, 피난민 접수와 등록, 취약계층 보호계획 등이 포함됐다.
스웨덴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나타난 대규모 민간인 이동을 중요한 교훈으로 제시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접하고 있는 폴란드 역시 국민 비상대비를 강화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의 '안전 가이드'는 국민들에게 최소 3일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가정 비축품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도록 요구한다.
식량과 식수뿐 아니라 구급약과 비상현금, 손전등, 라디오, 보조배터리 등을 준비하고 가족별 비상연락망과 대피 장소도 미리 정하도록 권고한다.
장기간 정전이 발생할 경우 카드결제와 인터넷, 전화뿐 아니라 수도와 난방도 중단될 수 있기 때문에 1인당 하루 최소 3리터의 식수를 준비하도록 하고 있다.
핀란드도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가정이 최소 72시간 동안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
정부 지침은 물과 식량, 의약품과 생활필수품을 최소 3일분 준비하도록 권고한다.
핀란드 당국이 72시간을 강조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대규모 위기가 발생하면 정부와 구조기관이 초기 며칠 동안 가장 위험한 지역과 도움이 절실한 취약계층에 우선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 가정이 일정 기간 스스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가정 단위 비상대비는 오랫동안 정부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미 국토안보부와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Ready 캠페인은 모든 미국인이 대형 재난 발생 후 최소 3일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기본 물품을 갖춰야 한다고 안내한다.
비상키트에는 1인당 하루 1갤런의 물과 최소 3일분의 비상식량, 손전등과 라디오, 여분의 배터리, 응급처치 키트와 위생용품 등을 포함하도록 권고한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역시 최소 3일분의 식수를 기본으로 준비하고 가능하면 2주분까지 확보할 것을 권고한다.
일부 미국 주정부의 권고는 연방정부의 기본 지침보다 훨씬 강하다.
네바다주 비상관리·국토안보국은 최근 주민과 방문객이 대형 재난 발생 시 최대 30일까지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Plan Ahead Nevada'를 운영하고 있다.
네바다주는 가정별 비상계획을 만들고 경보체계를 확인하며 대피로를 사전에 숙지하고 비상물품을 준비하도록 권고한다.
특히 별도의 비상대비 안내에서는 식량과 물, 의약품과 기타 필수품을 최대 30일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안내한다.
최근 각국 정부 지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단순히 식량과 물만 준비하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규모 정전이나 사이버공격이 발생할 경우 은행의 카드결제망과 현금자동입출금기,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동시에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영국과 폴란드 등은 소액 현금을 집에 보관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배터리 또는 수동식 라디오를 준비해 인터넷이 끊긴 상황에서도 정부의 비상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휴대전화 보조배터리와 손전등, 종이에 적은 가족 전화번호와 중요 신분증 사본도 새로운 비상키트의 기본물품으로 포함되고 있다.
각국 정부가 비상대비 정책을 강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기의 종류가 과거보다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EU 집행위원회는 현재 유럽이 지정학적 긴장과 군사충돌, 사이버공격과 정보전, 기후변화, 자연재해 등 서로 연결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각국에 전기와 천연가스, 식량, 교통과 통신망이 군사적 충돌과 동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여기에 대규모 사이버공격으로 금융망과 전력망, 통신망이 마비될 가능성까지 커지면서 민방위의 개념이 과거 공습대피 중심에서 '생활 인프라를 며칠 동안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의 핵심은 모든 국민이 장기간 생존물자를 쌓아놓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형 재난이나 군사위기가 발생한 직후 정부의 구조·지원 역량은 가장 심각한 피해지역과 노인, 장애인, 환자 등 취약계층에 우선 투입될 수밖에 없다.
일반 가정이 처음 3일이나 1주일을 스스로 버틸 수 있다면 그만큼 정부와 구조기관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유럽 각국의 기본적인 민방위 논리다. 핀란드 정부도 72시간 자립기간을 당국이 상황을 통제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웨덴은 이를 한 단계 더 나아가 국가 방위력의 일부로 규정한다. 국민들이 일정 기간 정부 지원 없이 생활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전쟁이나 장기 위기에서 국가의 회복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한 비상식량 캠페인을 넘어선다.
EU는 학교 교육과정에 재난대비 교육을 포함시키고 EU 차원의 비축전략과 위기조정 허브를 구축하며 민간과 군이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훈련까지 계획하고 있다.
스웨덴과 북유럽 국가들은 식량과 핵심물자의 국가비축을 확대하고, 전쟁 상황에서 국경을 넘어 주민을 대피시키는 공동계획까지 마련하고 있다.
영국도 10월부터 3년에 걸친 전국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국민의 가정 단위 대비를 국가 회복력 정책의 한 축으로 끌어올렸다.
유럽과 미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최근 흐름은 각국 정부의 위기대응 전략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정부와 군, 경찰과 소방기관이 시민을 지원하는 것이 민방위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전쟁과 사이버공격, 전력망 장애처럼 국가 전체가 동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위기에서는 정부가 모든 가정에 즉시 도움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확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EU는 72시간, 독일은 최대 10일, 스웨덴은 최소 1주일의 자립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최대 30일까지 대비하는 정책이 등장했다.
식량과 물, 의약품을 준비하라는 각국 정부의 권고는 결국 단순한 재난용 비축을 넘어, 예측하기 어려운 복합위기에 대비해 국민 개개인을 국가 위기대응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새로운 민방위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