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2 11:13 AM

미국, 러시아 가스 유럽 판매 재개 추진...우크라이나 경유 '에너지 휴전' 구상

By 전재희

쿠슈너·위트코프, 모스크바·키이우에 제안...미국 중개업체 통해 제재 우회 검토
러시아 판매대금은 제3국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우크라이나엔 통과수수료 지급
EU는 "러시아 가스 의존 되돌릴 수 없다" 반발...겨울 앞두고 낮은 가스 재고가 변수

미국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기존 파이프라인을 통해 다시 유럽에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시설 상호공격을 중단시키는 '에너지 휴전'을 성사시키고, 동시에 유럽의 높은 가스가격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러시아 석유 펌프시설
(러시아 원유 시추시설. 자료화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 방안은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와 스티브 위트코프(Steve Witkoff) 미국 특사가 지난 9월 모스크바와 키이우를 방문했을 때 논의했다. 핵심은 러시아 가스를 미국계 중개업체를 통해 유럽에 판매함으로써 기존 제재와 직접 거래의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러시아 가스를 미국이 중간에서 판매

미국 측이 검토하는 구조는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를 직접 판매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미국의 중개업체가 받아 유럽에 다시 판매하는 형태다.

이렇게 하면 러시아와 유럽 기업의 직접 거래를 피하면서 현재의 제재체계와 정치적 반발을 우회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구상이다.

WSJ는 이 구조가 미국 투자자들에게도 상당한 사업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통과 파이프라인 즉시 활용 가능

미국이 주목하는 것은 소련 시절부터 운영돼온 우크라이나 경유 가스관이다.

러시아 시베리아 우렌고이 가스전에서 생산한 천연가스를 우크라이나를 거쳐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으로 보내는 네트워크다.

이 파이프라인은 2025년 1월 운송이 중단되기 전까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일정량의 가스를 계속 운송했다.

Nord Stream 1과 Nord Stream 2가 해저 폭발로 크게 파손돼 재가동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과 달리, 우크라이나 경유 파이프라인은 정치적 합의만 이뤄진다면 비교적 빠르게 운송을 재개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도 통과수수료 확보

이 구상의 또 다른 목적은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수입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러시아 가스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통과하면 키이우 정부는 가스관 사용에 따른 통과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전쟁 장기화로 재정압박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상당한 외화수입원이 될 수 있다.

미국 협상단은 이 때문에 러시아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에도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방안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가스 판매대금은 에스크로 계좌에

가장 민감한 문제는 러시아가 벌어들이는 돈이 전쟁자금으로 사용될 가능성이다.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의 가스 판매대금을 제3국의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를 판매하더라도 해당 수익을 즉시 사용할 수 없도록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 구조를 통해 러시아가 전쟁자금으로 가스수익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푸틴에게 에너지 휴전 유인 제공

미국 협상단은 러시아가 유럽 가스시장에 다시 진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에게 강력한 협상 유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유럽에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를 판매하며 상당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전쟁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를 줄이면서 이 시장을 대부분 잃었다.

미국은 유럽시장 재진입을 허용하는 대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발전소와 전력망, 가스시설 공격을 중단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유시설 공격 재개로 협상 다시 급해져

이 구상은 지난달 한동안 뒤로 밀려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을 받아 러시아 정유공장 공격을 약 2주간 중단하면서 미국은 보다 포괄적인 평화협상 가능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키이우가 지난주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재개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사흘 동안 러시아 주요 정유공장 3곳을 공격했다.

이에 따라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의 에너지시설을 공격하지 않는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미국 측의 압박도 다시 강해지고 있다.

11월 중순 아부다비 3자협상 예정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11월 중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3자 평화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미국은 이 협상에 앞서 에너지 휴전을 우선 성사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지금까지 미국이 제안한 포괄적인 에너지 휴전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Dmitry Peskov)는 2일 현재 상황에서는 러시아 가스의 유럽 수출을 즉시 재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구매자와 판매자가 합의한다면 향후 수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유럽은 강하게 반대

가장 큰 장애물은 유럽이다.

EU는 현재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있으며 2027년 말까지 완전히 중단하는 법안을 마련한 상태다.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가장 큰 전략적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다시 러시아 에너지에 의존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반복해서 밝혀왔다.

EU의 공식 입장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과거 수준의 의존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EU 에너지위원 "러시아는 다시 신뢰할 수 없다"

댄 요르겐센(Dan Jørgensen) EU 에너지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러시아산 가스 수입금지 조치가 영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일 평화가 온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내부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자체가 러시아 에너지 의존의 위험성을 증명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러시아가 가스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을 군사력 강화에 사용했고, 그 군사력이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원됐다는 것이다.

유럽 당국자 "체코슬로바키아 넘긴 뮌헨협정과 같다"

일부 유럽 고위 관계자의 반발은 더욱 강하다.

한 북유럽 국가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 가스 구매 재개가 유럽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모든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럽 대국의 고위 관계자는 이 방안을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영국 총리가 1938년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넘긴 뮌헨협정에 비유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와 경제거래를 재개하는 것은 푸틴에게 경제적 보상을 주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다.

트럼프 1기와는 완전히 반대

미국의 현재 입장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트럼프는 당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가 추진한 Nord Stream 2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이 가스관이 독일을 "러시아의 포로"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고 2019년 말에는 사업 관련 기업에 제재를 부과했다.

그러나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 가스를 다시 유럽에 공급하는 것을 평화협상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미국 "문제는 파이프라인 자체가 아니라 안보합의 부재"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메르켈의 실수가 러시아와 가스관을 건설한 것 자체가 아니라 러시아와 보다 광범위한 안보합의를 먼저 만들지 않은 데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장기적으로 Nord Stream 재가동까지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새로운 안보·경제협정에 포함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실제 재가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Nord Stream 1과 2는 2022년 9월 해저 폭발로 크게 파손됐기 때문이다.

유럽 러시아 가스 의존도 45%→11%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에너지 구조를 크게 바꿨다.

전쟁 직전 유럽에서 소비되는 천연가스의 약 45%가 러시아산이었다.

현재는 약 11%까지 감소했다.

남아 있는 러시아 가스는 LNG선이나 TurkStream 파이프라인을 통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등에 공급되고 있다.

반면 미국산 LNG는 이제 유럽 전체 가스 소비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LNG가 러시아 가스를 대체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가 사라진 자리는 미국산 액화천연가스가 상당 부분 차지했다.

미국은 셰일가스 생산 확대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LNG 수출국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고 유럽은 미국산 LNG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 가스를 다시 대량으로 유럽에 공급할 경우 미국 LNG 산업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에너지 가격 안정과 러시아·우크라이나 휴전을 더 중요한 목표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전쟁이 유럽 계산 바꿀 수도

미국은 유럽의 강경한 반대가 결국 약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가장 큰 변수는 이란전쟁과 에너지 가격이다.

카타르산 LNG 상당량이 페르시아만에 묶여 있고 호르무즈해협의 불안정으로 국제 에너지가격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EU에 따르면 이란전쟁 이후 유럽이 추가로 부담한 에너지 비용은 약 1000억유로, 1120억달러에 달한다.

유럽 가스 저장률 75%...최근 수년보다 낮아

겨울을 앞둔 유럽의 가스 재고도 변수다.

유럽의 지하 천연가스 저장시설은 현재 약 75%가 채워져 있다.

EU 에너지 규제기관에 따르면 이는 최근 9년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다.

겨울 기온이 평년보다 낮거나 LNG 공급에 추가 차질이 발생할 경우 유럽 가스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러시아 가스 재도입을 설득하려 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러시아 가스 재개 요구 등장

유럽 정치권 내부에서도 모든 세력이 같은 입장은 아니다.

독일의 주요 야당인 우파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2028년 총선을 앞두고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재개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높아질수록 러시아산 가스 재도입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이러한 내부 압력이 결국 유럽의 공식 입장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키이우가 찬성하면 유럽도 움직일 가능성

유럽의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우크라이나의 동의다.

외교관들은 키이우가 러시아 가스 판매를 포함한 에너지 휴전안을 공식적으로 지지한다면 유럽 지도자들이 현재의 반대입장을 바꾸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발전소와 전력망 공격을 중단하고 겨울철 대규모 정전을 막을 수 있다면 키이우 역시 경제적 타협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

우크라이나 방공망 고갈도 압박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러시아는 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발전소와 송전망, 도시 인프라에 대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확대하고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방공미사일은 크게 부족해졌다.

WSJ에 따르면 이란전쟁으로 Patriot 요격미사일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의 전력망이 겨울 동안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경우 대규모 정전과 난방 중단이 발생할 수 있다.

유럽, 새로운 난민사태 우려

외교관들은 겨울철 우크라이나 도시의 전력과 난방이 장기간 마비될 경우 새로운 대규모 난민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수백만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다시 EU 국가로 이동할 경우 유럽 내부의 정치적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을 중단시키기 위한 대가로 러시아 가스 판매를 일부 허용하는 방안이 유럽 내부에서도 현실적인 선택지로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너지 휴전이 평화협상의 첫 단계

미국의 구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면적인 전쟁 종식보다 상대적으로 합의가 쉬운 에너지 분야부터 휴전을 시작하자는 접근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유시설을 공격하지 않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발전소와 전력망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유럽 가스시장에 제한적으로 복귀하고 우크라이나는 통과수수료를 받는다.

러시아가 받는 가스 판매대금은 에스크로 계좌에 묶어 전쟁에 직접 사용할 수 없도록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유럽 모두에게 경제적 유인

미국 입장에서는 세 당사자 모두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러시아는 유럽시장에 다시 가스를 판매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통과수수료를 확보하고 에너지 인프라 공격을 줄일 수 있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값싼 파이프라인 가스를 확보해 겨울철 에너지가격을 낮출 수 있다.

미국 기업도 중개와 금융구조에 참여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장벽은 여전히 높아

문제는 경제논리보다 정치·안보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는 점이다.

유럽은 지난 4년 동안 러시아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LNG 터미널을 건설하고 미국과 중동에서 새로운 공급선을 확보했으며 러시아산 가스의 단계적 퇴출을 법제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러시아산 가스를 대규모로 구매하는 것은 유럽의 기존 전략을 뒤집는 결정이 된다.

미국이 다시 러시아를 유럽 에너지시장으로 불러들이나

이번 협상에서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의 전략 자체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러시아 가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이 안보위험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바로 그 러시아 가스를 평화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려 하고 있다.

에너지 공급을 차단해 러시아를 압박하는 전략에서 러시아의 에너지시장 복귀를 보상으로 제공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바꾼 셈이다.

러시아 가스의 우크라이나 경유 판매가 실제로 재개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겨울을 앞두고 유럽의 가스재고가 낮고 이란전쟁으로 국제 에너지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새로운 구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유럽 에너지정책을 동시에 뒤흔들 수 있는 협상 카드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