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말레이시아 인근에 이란 관련 선박 수십 척 표류...연료·식량·식수 부족도
미국, 급유·정비·식료품 공급업체까지 2차 제재 경고...아시아 항만들 서비스 거부
이란산 원유 중국으로 보내던 해상 환적망 타격...빈 유조선도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해
Kpler "남은 원유 판매 끝나면 12월 이란 원유수입 사실상 중단 가능성"
미국의 대이란 압박전략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넘어 아시아 해역에서 활동해온 이란의 이른바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전체를 압박하는 단계로 확대되고 있다.
이란산 원유를 중국으로 운반해온 유조선 수십 척이 스리랑카와 말레이시아, 인도양 일대에서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으며 일부 선박에서는 연료와 식량, 식수까지 부족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리랑카 남서쪽 약 15마일 해상에만 빈 이란 유조선 약 20척이 엔진을 최소한으로 가동한 채 떠 있다.
지난 7월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봉쇄를 다시 강화한 이후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선박들이다. 미국은 최근에는 해당 유조선들에 연료와 식량, 정비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도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란 원유 운송망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란 원유 중국으로 운반하던 '해상 릴레이'가 멈췄다
전쟁 이전 이란산 원유가 중국으로 향하는 방식은 상당히 복잡했다.
이란 항구에서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온 뒤 말레이시아 인근 국제수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다른 유조선으로 원유를 옮겨 싣는 선박 대 선박 환적, 즉 STS(ship-to-ship transfer)를 실시한다.
원유를 넘겨받은 다른 선박이 중국 정유시설로 향하고, 원래의 이란 관련 유조선은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 새로운 원유를 싣는다.
이 같은 방식은 선박 이름과 국적, 소유구조를 복잡하게 바꾸고 해상에서 원유를 옮겨 실으면서 미국의 이란 원유 제재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왔다.
미 재무부 역시 이란이 해외 원유판매를 유지하기 위해 제3국 선박과 해운사, 선박관리회사 등을 이용하는 그림자 선단을 운용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올해 2월에도 이란산 석유 운송에 관여한 30개 이상의 개인·기업·선박을 제재하면서 이 네트워크가 이란의 주요 외화수입원이라고 밝혔다.
7월 호르무즈 봉쇄 이후 빈 배들이 돌아갈 곳 잃어
문제는 미국이 7월 호르무즈 해협과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를 다시 강화하면서 시작됐다.
중국으로 원유를 전달하고 임무를 마친 유조선들이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해역에 머물고 있는 제재 대상 유조선 엘바(Elva)가 대표적이다.
WSJ에 따르면 엘바는 지난 6월 이란 카르그섬(Kharg Island)에서 원유를 싣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이후 8월 말레이시아 인근에서 다른 선박으로 원유를 옮겨 실었지만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재까지 현지 해역에 머물고 있다.
이런 선박들이 말레이시아와 스리랑카 주변에 수십 척씩 쌓이면서 과거 지속적으로 순환하던 이란 원유 운송 시스템 자체가 멈추기 시작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앞바다의 '해상 무국적 지대'
이란의 그림자 선단이 오랫동안 이용해온 대표적인 장소는 말레이시아 동쪽의 EOPL(Eastern Outer Port Limits) 해역이다.
국제항로와 가까우면서도 여러 관할권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어 이란산 원유의 선박 간 환적이 빈번하게 이뤄져온 곳이다.
미국과 서방 당국은 이곳에서 이란산 원유가 다른 선박으로 옮겨진 뒤 원산지가 불분명해지는 방식으로 중국에 들어가는 사례를 추적해왔다.
미 국무부도 과거 이란 원유거래에 관여한 말레이시아 소재 해운사를 제재하면서, 이란산 원유가 아시아 구매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여러 국가의 해운·선박관리 회사들이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배에 기름 넣어주는 사람'
최근 미국의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원유를 직접 운반하는 선박만 제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조선이 장기간 바다에 머물려면 선박용 연료와 식량, 식수, 예비부품, 수리서비스가 필요하다.
미국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까지 제재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WSJ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8월 이란 관련 선박에 연료를 공급한 기업 네트워크를 제재했다. 이후 아시아의 일부 항만과 해운서비스 업체들이 이란 선박과 거래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기존 이란 제재체계에서도 지정된 선박이나 기업과 거래하는 제3자가 미국 제재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반복돼왔다. 미 국무부는 제재 대상 이란 선박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거래 역시 제재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명시해왔다.
스리랑카에 "19척 지원하지 말라" 압박
미국의 압박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은 스리랑카다.
WSJ이 확인한 스리랑카 정부 문서에 따르면 콜롬보 주재 미국대사관은 지난 8월 스리랑카 서부 해안 인근에 이란 관련 유조선 19척이 있는 것을 추적하고 있다고 스리랑카 정부에 통보했다.
미국 측은 현지 항만서비스업체와 선박급유업체 등이 해당 선박에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미국의 2차 제재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이후 상당수 이란 선박은 스리랑카 영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인도양 쪽으로 이동했다.
선박들은 연료를 아끼기 위해 엔진을 최소한으로 가동한 채 해상에서 떠 있는 것으로 선박추적자료에서 나타났다.
이란 국적 컨테이너선까지 서비스 거부
압박대상은 유조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WSJ에 따르면 지난 9월 초 이란 국적 컨테이너선 2척이 콜롬보항 인근에 정박하자 스리랑카 항만당국은 미국 제재위험 때문에 이란 국적 선박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의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유뿐 아니라 옥수수와 산업용 원자재 등 이란으로 들어가는 일반 화물운송도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이 이란 원유 수출을 막는 동시에 이란 선박이 해외 항만과 국제 해운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경제적 고립 효과가 확대되는 것이다.
스리랑카 관리 40여명 대상으로 미국 제재교육
미국은 현지 정부기관에 직접 제재 관련 교육도 실시했다.
WSJ에 따르면 콜롬보 주재 미국대사관은 9월 중순 스리랑카 정부 관계자 40여명을 대상으로 사흘간의 교육을 진행했다.
선박대리점과 급유업체, 수리업체 등이 제재대상 선박을 알고도 또는 모르고 지원할 경우 어떤 제재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측은 스리랑카가 세계 주요 해상교통로의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제재회피 감시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원유 안 실은 빈 배도 돈만 먹는 자산"
미국이 보급망까지 압박하는 이유는 선박 운용 자체의 비용을 높이기 위해서다.
유조선은 화물을 운반하지 않고 바다에 정박해 있기만 해도 선원 급여와 연료, 보험, 유지보수 비용이 계속 발생한다.
유나이티드 어게인스트 뉴클리어 이란(UANI)의 마크 월러스(Mark Wallace) 최고경영자는 WSJ에 "원유를 싣지 않은 채 멈춰 있는 배는 예산에 구멍만 만드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림자 선단 운영비가 높아질수록 이란산 원유를 운반하려는 선주와 해운회사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 강경 제재론자들의 논리다.
선원들은 식량·물 부족...인도적 문제도 부상
그러나 이 전략의 또 다른 결과는 선박에 남아 있는 선원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스리랑카 해운업체 관계자들은 최근 이란 선박 대리점으로부터 식량과 연료, 식수 공급을 요청하는 연락을 받고 있지만 당국 승인을 받기 어려워 실제 공급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WSJ에 말했다.
한 스리랑카 선박수리업체는 제재 강화 직전에 이란 선박에 작업자를 보냈는데 당시 이미 선내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평소라면 선박에서 작업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샤워시설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지만 당시 선원들은 물을 아껴야 한다며 수리팀에 음식과 물을 직접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부 선박에서는 연료뿐 아니라 식수와 음식마저 부족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스리랑카 "긴급 지원 필요해도 민간업체가 제재 두려워할 것"
스리랑카 정부도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
스리랑카 외교부 대변인 투샤라 로드리고(Thushara Rodrigo)는 제재 선박이 식량과 물, 연료 부족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인도적 차원의 긴급지원이 필요하더라도 민간기업들이 미국의 제재를 우려해 서비스를 제공하기를 꺼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 국무부는 이란의 불법 원유거래를 계속 방해하고 해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WSJ의 선원 생활조건 관련 질의에는 별도의 답변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란에 대한 경제적 압박과 민간 선원의 기본적인 인도적 지원을 어디에서 구분할 것인지도 앞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단속 강화 움직임
말레이시아 주변에 남아 있는 이란 관련 선박들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UANI 분석가들은 과거 원유 환적이 집중됐던 EOPL에서 일부 선박들이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말레이시아 당국의 단속 강화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이미 이란산 원유의 아시아 운송과 관련해 말레이시아 해운기업을 제재한 전례가 있다.
미 재무부는 지난 2월에도 그림자 선단이 선박 소유구조와 등록국가를 바꾸고 복잡한 운송망을 이용해 이란산 원유를 해외시장으로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으로 향하던 남은 원유도 빠르게 감소
미국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중요한 변화는 실제 이란의 원유수입에서 나타날 전망이다.
현재 중국으로 전달되고 있는 일부 이란산 원유는 호르무즈 봉쇄가 재개되기 전에 이미 해협 밖으로 빠져나간 물량이다.
이 물량이 모두 판매되면 새로운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뒤따르기 어려워진다.
에너지 분석업체 Kpler의 호마윤 팔락샤히(Homayoun Falakshahi)는 현재 아시아에 남아 있는 이란산 원유 판매가 앞으로 몇 주 안에 대부분 끝나고 결제도 연말까지 완료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 12월에는 이란의 신규 원유판매 수입이 사실상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WSJ에 말했다.
이는 전망치이기 때문에 실제 결과는 호르무즈 봉쇄와 미·이란 협상, 중국의 구매정책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란의 가장 중요한 외화수입원이 흔들린다
원유는 이란 경제의 핵심 외화수입원이다.
특히 미국과 서방의 금융제재로 정상적인 국제금융시장 접근이 제한된 이란에는 중국에 대한 원유판매가 중요한 현금창구 역할을 해왔다.
미 재무부는 이란산 석유와 석유제품의 해외판매가 이란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며, 이 자금이 군사 프로그램과 역내 무장세력 지원 등에 사용된다고 주장하며 관련 선박과 기업을 지속적으로 제재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에도 'Operation Economic Outcast'를 통해 이란과 거래하거나 군사조달을 돕는 해외 기업과 개인을 추가 제재하고 있다. 9월29일에도 중국·홍콩·파키스탄 등과 연계된 10개 개인과 기업을 추가 지정했다.
이란만 막히고 걸프 산유국 수출은 회복
이번 압박의 효과를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 다른 걸프 산유국들의 원유수출은 오히려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중동산 원유는 우회 송유관과 선박 간 환적, 미국의 해상보호 등을 이용하면서 전쟁 이전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
9월 중동 주요 산유국의 원유수출은 전쟁 이후 최고 수준으로 회복됐고 일부 집계에서는 전쟁 이전 물량의 80% 이상까지 올라온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봉쇄로 새로운 원유를 호르무즈 밖으로 내보내는 데 큰 제약을 받고 있다.
즉 호르무즈 해협을 막아 세계 에너지 공급을 압박하려던 이란의 전략은 점점 다른 걸프 국가보다는 이란 자신의 원유수입에 더 큰 부담을 주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 전략은 '배를 잡는 것'보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
이번 조치가 보여주는 미국의 전략은 반드시 모든 이란 유조선을 나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선박을 움직이려면 보험과 금융서비스, 선박용 연료, 식량, 식수, 정비, 항만 접근 등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막히면 선박은 장기간 정상적으로 운항하기 어렵다.
미국이 아시아의 항만업체와 해운대리점, 연료공급업체까지 제재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 네트워크를 끊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조선을 직접 압수하지 않더라도 배를 사실상 해상에 묶어놓을 수 있다.
압박이 강해질수록 새로운 우회망도 생길 가능성
다만 제재가 이란 원유거래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란은 과거에도 미국의 제재가 강화될 때마다 새로운 선박관리회사와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고, 선박명을 변경하거나 국적을 바꾸고, 해상에서 화물을 옮기는 방법을 이용해 수출망을 재구축해왔다.
미국 정부 역시 이란 선박이 서류 위조와 선박 재등록, 복잡한 소유구조 등을 이용해 제재를 회피해온 사례를 오랫동안 추적해왔다.
따라서 현재 수십 척의 유조선이 아시아 해상에 묶여 있다고 해서 이란의 원유 암시장 전체가 영구적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이 계속 이란산 원유를 구매하려 한다면 새로운 운송망이나 환적지역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노리는 것은 결국 이란의 협상력 약화
현재 미국의 해상봉쇄와 그림자 선단 압박은 별개의 정책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원유수입을 줄여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전쟁과 핵·안보 협상에서 테헤란의 경제적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이란의 원유거래뿐 아니라 무기조달, 금융망, 암호화폐 거래망에도 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재무부는 이를 이란의 금융·군사적 지원망을 차단하기 위한 'Operation Economic Outcast'의 일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란은 반대로 미국의 봉쇄 해제와 원유수출 재개, 동결자산 해제 등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최근 제시한 휴전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다에 멈춰 선 유조선이 보여주는 제재의 실제 모습
결국 스리랑카와 말레이시아 앞바다에서 떠다니고 있는 빈 유조선들은 미국의 대이란 압박정책이 실제 해운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박들은 원유를 중국으로 운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항구에 들어가 연료와 식량을 공급받기도 어려워졌다.
선박을 소유한 기업에는 유지비용이 계속 발생하고, 선원들은 식량과 물 부족 위험까지 겪고 있다.
그리고 기존 선박들이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새 이란산 원유를 실어 나를 선박 수도 줄어든다.
미국은 이를 통해 이란 원유를 직접 모두 압수하지 않고도 거래의 순환을 끊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Kpler가 예상한 대로 남아 있는 원유가 모두 중국 등 구매자에게 전달되고 새로운 수출이 막힌다면 올해 말에는 이란의 원유수입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장기간 국제수역에 고립된 선원들의 안전과 인도적 지원 문제가 커질 수 있고, 이란과 거래를 계속하려는 국가와 기업들이 새로운 제재회피 경로를 만들 가능성도 남아 있다.
따라서 아시아 해역에 표류 중인 수십 척의 유조선은 현재 미국과 이란의 대결이 군사적 봉쇄를 넘어 원유 운송과 항만서비스, 금융·보험, 심지어 선박에 공급되는 식량과 식수까지 포함하는 경제전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