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직접 서명한 초당적 '그레이엄법' 핵심 제재 적용 중단
러시아산 원유 주요 수입국 100% 관세 등 유예...기존 대러시아 제재는 유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지난달 자신이 서명한 초당적 대러시아 제재법의 핵심 조항 대부분을 당분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국가들에 부과할 예정이던 고율 관세를 비롯해 러시아 관련 추가 제재 상당 부분이 시행 직전 유예됐다.

트럼프는 16일 밤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이 같은 면제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다만 백악관이 공개한 행정명령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 지금 제재를 유예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달 서명한 '그레이엄법' 한 달 만에 핵심 조항 유예

트럼프는 지난 9월 18일 '린지 O.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Lindsey O. Graham Sanctioning Russia and Iran Act of 2026)'에 서명했다.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 자료화면)

고(故)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의 이름을 딴 이 법은 러시아 정부 관계자와 기관 등에 추가 제재를 부과하고,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계속 구매하는 국가들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의회에서는 민주·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법은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5개국이 10월 18일 이후에도 신규 구매를 계속할 경우 이들 국가의 미국 수출품에 100%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제재 회피를 가장 많이 지원하는 5개국에도 100% 관세를 부과하도록 했다. 러시아산 상품 자체에는 5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법에 포함된 대통령 면제 권한 활용

그러나 이 법에는 대통령이 해당 제재가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고 판단할 경우 적용을 면제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대통령이 의회에 서면으로 해당 면제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인증서를 제출하고 그 근거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전달하면 제재를 유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번 행정명령에서 이 권한을 행사했다. 백악관은 대통령이 필요한 인증서와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러시아산 원유·가스의 주요 수입국과 제재 회피 지원국에 대한 관세를 비롯해 그레이엄법의 상당수 제재조항이 당분간 시행되지 않는다.

18일 발효 예정이던 관세 사실상 중단

러시아산 에너지 주요 구매국에 대한 100% 관세는 당초 18일부터 적용될 수 있었다.

WSJ에 따르면 법은 트럼프에게 러시아산 원유의 5대 수입국을 대상으로 30일 이내에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도록 했으며 실제 세율은 대통령이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한이 18일 만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행정명령으로 해당 조치는 시행 직전에 유예됐다.

트럼프 대통령 또는 국무장관은 향후 상황이 달라졌다고 판단할 경우 다시 제재 적용에 나설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법 자체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 적용을 중단한 것이다.

기존 러시아 제재까지 해제한 것은 아니다

이번 조치가 미국의 기존 대러시아 제재 전체를 해제한 것은 아니다.

백악관 행정명령은 러시아 정부의 특정 유해행위에 대응해 기존 행정명령으로 부과돼 있던 제재와 이미 제재 대상에 오른 개인·기관에 대한 조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지난달 새롭게 제정된 그레이엄법을 통해 추가될 예정이었던 제재와 관세 대부분의 시행을 유예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러시아산 디젤 거래 발표 뒤 나온 결정

이번 결정은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과 협의한 뒤 러시아산 디젤을 구매하는 거래를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WSJ는 이를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모스크바와 경제적 협상 여지를 확대하려는 최근 정책 변화의 연장선으로 평가했다. 동시에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 높은 에너지 가격을 낮추려는 목적도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러시아와 경제적 관계를 활용해 푸틴을 협상으로 끌어들이고, 전쟁을 단계적으로 종료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해왔다.

젤렌스키 "러시아 압박 완화하면 공격 계속 부추길 것"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즉각 반발했다.

젤렌스키는 17일 소셜미디어에서 미국의 제재 공백과 러시아에 대한 압박 완화, 푸틴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혜택이 결국 러시아의 공격을 계속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생전의 그레이엄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게시하며 그레이엄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젤렌스키에게 전쟁 종식을 위한 합의를 요구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에너지 거래와 협상 가능성을 확대하고 있다.

공화·민주 양당 일부에서 반발

트럼프의 결정에는 미국 의회 양쪽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이번 임기를 끝으로 은퇴하는 돈 베이컨(Don Bacon·공화·네브래스카) 하원의원은 트럼프의 정책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안 공동 발의자인 리처드 블루멘털(Richard Blumenthal·민주·코네티컷) 상원의원도 이번 면제가 미국의 국가안보와 관계없는 결정이라며 푸틴에게 부당한 혜택을 주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이는 두 의원의 정치적 평가다.

트럼프, 필요하면 제재 다시 발동 가능

이번 행정명령은 대러시아 제재법 자체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백악관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국무부·재무부·에너지부 등과 함께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구매 현황, 러시아의 제재 회피를 지원하는 국가들의 활동을 계속 감시하도록 했다.

상황 변화에 따라 대통령에게 추가 조치를 권고하도록 했으며, 트럼프 또는 국무장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현재의 면제를 철회하고 법에 규정된 관세와 제재를 다시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번 조치의 핵심은 의회가 통과시킨 대러시아 추가 제재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가이익 면제조항을 활용해 대부분의 시행을 일단 보류한 데 있다.

그 결과 러시아와 러시아산 에너지를 구매하는 국가들을 겨냥해 18일부터 본격화될 예정이었던 새로운 경제적 압박은 당분간 중단됐으며, 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 상황에 따라 트럼프가 이를 다시 발동할지 여부가 새로운 변수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