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달러 이상 자산가에 일회성 5% 부유세...11월 3일 주민투표
뉴섬·베세라 반대, 주 민주당은 찬성...실리콘밸리 거부들은 3억달러 넘는 선거전에 총력.
캘리포니아에서 억만장자들에게 일회성 5%의 부유세를 부과하는 주민발의안이 민주당과 노동계, 실리콘밸리의 정치적 동맹구조를 뒤흔들고 있다.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오는 11월 3일 순자산 10억달러 이상인 주민들에게 일회성으로 5%의 세금을 부과하는 안을 승인할지 결정한다. 미국에서 억만장자를 직접 겨냥한 부유세가 주민투표에 올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독립 여론조사에서는 찬성 의견이 반대보다 소폭 앞서고 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은 유권자도 상당수다.
당초 구상은 비교적 단순했다. 연방정부의 Medicaid 예산삭감으로 발생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의료재정 부족을 억만장자들의 자산에 세금을 부과해 메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주민투표가 다가오면서 사태는 훨씬 복잡해졌다. 민주당 지도부와 진보진영이 갈라졌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온 노동조합들조차 찬반으로 나뉘었다.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은 세금을 막기 위해 거액을 투입했고, 발의안을 주도한 노조 지도자를 둘러싼 협박·갈취 의혹까지 불거졌다. WSJ는 이번 싸움을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비용이 많이 들어간 주민투표 전쟁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100억달러 자산가라면 세금 5억달러
발의안은 2026년 말 기준 순자산이 10억달러 이상인 캘리포니아 주민에게 순자산의 5%를 일회성으로 부과한다.
과세대상은 소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상장주식과 채권, 비상장기업 지분, 지식재산권, 예술품 등 각종 자산이다. 예를 들어 순자산 100억달러인 사람이 대상이 되면 5억달러를 납부해야 한다.
더 논란이 되는 부분은 거주기준이다.
세금은 2026년 1월 1일 당시 캘리포니아 주민이었던 사람에게 적용되도록 설계됐다. 따라서 주민투표가 통과된 뒤 다른 주로 이사하더라도 과세를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같은 소급적용 방식과 다른 법률적 쟁점들은 발의안이 통과될 경우 법정에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1000억달러 걷어 Medicaid 지키자"
발의안을 추진한 측은 캘리포니아의 억만장자 200~300명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약 1,000억달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이 돈이 병원 폐쇄를 막고 수백만명의 의료보험 상실과 보험료 급등을 방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발의안은 의료노조인 SEIU-United Healthcare Workers(SEIU-UHW)가 주도했다.
이 노조는 트럼프 행정부가 통과시킨 One Big Beautiful Bill Act로 향후 10년 동안 전국적으로 1조달러가 넘는 연방 의료지출이 줄어들고 그 대부분이 Medicaid에서 삭감될 것으로 예상되자 대응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Medicaid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지원 축소가 주 의료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노조 측의 주장이다.
실리콘밸리 거부들 "막아야 한다"
발의안은 곧바로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Google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을 중심으로 한 거액 자산가들은 억만장자세를 무력화할 수 있는 별도의 주민발의안 두 개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캘리포니아주가 자산 자체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억만장자세와 이를 막기 위한 두 개의 맞대응 주민발의안을 합친 선거자금은 3억달러를 넘어섰다.
이 가운데 약 90%가 억만장자세를 저지하기 위한 캠페인에 사용되고 있다.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TV와 온라인에서 세금에 반대하는 광고를 집중적으로 보고 있다.
일부 광고는 의사들이 등장해 세금이 오히려 병원과 클리닉 예산삭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광고에서는 "오늘은 억만장자에게 모든 자산을 신고하게 하지만 내일은 당신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뉴섬도 반대..."캘리포니아 경쟁력 훼손"
흥미로운 점은 공화당뿐 아니라 캘리포니아 민주당 지도부 상당수도 부유세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빈 뉴섬(Gavin Newsom) 주지사는 억만장자세가 고액자산가들을 다른 주로 떠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캘리포니아의 세수와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뉴섬은 대신 연방 차원의 전국적인 부유세를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2028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검토하고 있는 뉴섬뿐 아니라 그를 이어 주지사 후보로 나선 민주당의 하비에르 베세라(Xavier Becerra) 역시 이번 발의안에 반대한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민주당은 지난 8월 당 차원의 투표를 통해 발의안을 공식 지지했다.
실리콘밸리를 지역구로 둔 로 카나(Ro Khanna) 연방하원의원과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의원도 찬성 진영에 섰으며, 샌더스는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지지집회를 열었다.
"누가 억만장자에게 세금 매기는 걸 싫어하겠나"
초기에는 실리콘밸리의 부유층조차 주민투표에서 자신들이 패배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기술투자자 데이비드 프리드버그(David Friedberg)는 실리콘밸리 팟캐스트 'All In'에서 "누가 억만장자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을 싫어하겠느냐"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거물들은 Signal 채팅방에서 캘리포니아를 떠날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싸울지를 논의했고, 일부 패밀리오피스는 정치 컨설턴트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브린은 네바다주 쪽 레이크타호에 주택을 구입했고 PayPal 공동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의 회사는 마이애미 사무실을 열었다.
백악관 기술고문 데이비드 색스(David Sacks)는 텍사스 오스틴으로 이사했다고 밝혔다.
저커버그도 캘리포니아 떠날 가능성 검토
Meta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도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WSJ에 따르면 Meta 이사회는 저커버그가 캘리포니아에 계속 거주하면서 잠재적인 부유세를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식분할 조건을 협상했다. 이 내용은 지난주 규제당국에 제출된 서류에 포함됐다.
반면 암호화폐 억만장자 크리스 라슨(Chris Larsen)은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며 부유층이 정치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리콘밸리 부유층이 그동안 캘리포니아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약하게 대응했다고 비판했다.
노동조합도 두 쪽으로 갈라져
이번 주민투표에서 가장 예상 밖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노동계 내부의 분열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과 뉴섬을 지지해온 노동조합들이 부유세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섰다.
캘리포니아 노동조합연맹의 로레나 곤살레스(Lorena Gonzalez) 회장은 뉴섬 측에 "뉴섬이 노동조합을 대표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직접 항의했다고 밝혔다. 이후 노동조합연맹은 억만장자세 지지를 선언했다.
SEIU-UHW의 데이브 리건(Dave Regan) 회장에 따르면 뉴섬 역시 연방 Medicaid 삭감으로 캘리포니아가 연간 최대 250억달러의 손실을 볼 수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그러나 뉴섬은 리건에게 주민발의안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고, 노조가 세율을 5%에서 2%로 낮추는 타협안을 제안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건은 뉴섬이 2028년 대선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기부자들의 지지를 유지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뉴섬 측은 WSJ의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교사노조도 의견 엇갈려
교사노조 내부에서도 찬반이 갈렸다.
일부 교사노조는 억만장자세 수입의 90%가 별도의 의료계정에 들어가고 일반 주정부 예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에 불만을 표시했다.
또 캘리포니아교사협회(CTA)가 별도로 추진하는 고소득자 소득세의 영구화를 위한 주민발의안과 경쟁하면서 교육재정 확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그러나 United Teachers Los Angeles는 상급단체인 CTA와 달리 억만장자세 지지를 결정했다.
줄리 밴 윙클(Julie Van Winkle)은 "내 학생들이 의료보험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지지 이유를 설명했다. California Federation of Teachers도 찬성 진영에 합류했다.
의료계에서도 "장기해법 아니다"
의료계 역시 일치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
Planned Parenthood Affiliates of California는 일회성 부유세가 의료재정을 위한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5만명의 의사를 대표하는 California Medical Association의 더스틴 코코런(Dustin Corcoran) 최고경영자는 이번 발의안을 자신이 읽어본 주민발의안 가운데 "가장 형편없이 작성된 것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회성 세금이라는 점과 조성된 자금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통제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건설노조는 억만장자들과 같은 편
노동계의 분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건설노조다.
샌디에이고의 일부 건설노조는 억만장자세를 지지하지만 캘리포니아주 전체 건설노조는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고소득층이 캘리포니아를 떠날 경우 세수가 줄어들고 대규모 공공·민간 건설사업이 축소돼 조합원들의 일자리가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철공노조와 배관노조 조합원들은 10월 초 10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Protect Our Jobs'라는 팻말을 들고 부유세 반대집회를 열었다.
일부 조합원들은 현재는 억만장자에게만 적용되는 자산세가 향후 일반 근로자의 은퇴자산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발의안 주도 노조대표 둘러싸고 '갈취' 의혹까지
정치적 싸움은 개인적인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SEIU-UHW의 리건 회장은 캘리포니아의 수백개 의료클리닉을 대표하는 California Primary Care Association을 부유세 지지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달 제기된 연방법원 소송에 따르면 리건은 해당 협회가 부유세 반대를 철회하고 캠페인 자금을 자신의 노조 쪽에 제공하면 별도의 의료클리닉 규제 주민발의안을 철회하겠다는 제안을 중개인을 통해 전달한 것으로 주장됐다.
협회 최고경영자 프란시스코 실바(Francisco Silva)는 이를 "갈취(shakedown)"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SEIU-UHW 측은 해당 주장을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부인했다.
노조 내부에서도 협박·괴롭힘 조사
리건은 자신의 노조 상급조직인 SEIU California와도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SEIU California는 17개 노조, 100만명 이상의 근로자를 대표하며 이 가운데 리건이 이끄는 의료노조 조합원은 약 12만명이다.
리건이 부유세 지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동료 노조 간부들을 괴롭히고 협박했다는 민원이 제기됐고 외부 로펌 두 곳이 별도의 조사를 실시했다.
한 조사에서는 당시 SEIU California 회장 데이비드 우에르타(David Huerta)가 리건이 부유세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 노조 운영 문제에 대한 연방 노동부 조사가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리건은 협박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조사관들은 우에르타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고 WSJ는 전했다.
또 다른 전직 간부는 2009년 리건이 자신의 사무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책장 쪽으로 몰아붙인 뒤 고함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리건은 이 의혹을 부인했다.
11대4로 '중립' 선택한 SEIU California
갈등 끝에 SEIU California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억만장자세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 대신 중립을 택했다.
표결 결과는 11대4였다.
민주당과 가까운 미국 최대 노동조합 조직 가운데 하나가 억만장자 증세 문제에서 공식 지지를 하지 못할 정도로 내부 갈등이 심해졌다는 의미다.
'부자 증세' 하나로 기존 정치동맹 재편
이번 주민투표가 주목되는 이유는 단순히 억만장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것인지에 그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민주당은 공식적으로 찬성하지만 민주당 주지사와 차기 주지사 후보는 반대한다. 노동조합은 부유세를 지지하는 의료·교사노조와 이를 반대하는 건설노조로 갈렸다.
일부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은 캘리포니아를 떠날 가능성을 검토하는 반면 다른 부유층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같은 정치진영에 있던 세력들이 세금 하나를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케이티 포터 "이미 뜨거운 난장판"
진보성향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오렌지카운티 출신 전 연방하원의원 케이티 포터(Katie Porter)는 이번 세금에 반대하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뜨거운 난장판(hot mess)"이라고 평가했다.
억만장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사회복지에 사용하자는 구상은 미국 진보진영에서 오랫동안 주장돼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민주당 지지가 강한 주 가운데 하나인 캘리포니아에서도 실제 법으로 만들려고 하자 세수 유출과 기업경쟁력, 노동계의 이해관계, 의료·교육재정 배분, 위헌 가능성까지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다.
11월 3일 유권자들이 결정하게 될 것은 억만장자 200~300명에게 일회성 5%의 세금을 부과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벌어진 정치적 싸움은 그보다 더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에서 '억만장자 부유세'라는 정치적 구호가 실제 세금제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주당의 기존 정치연합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지가 캘리포니아 주민투표를 통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