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채권 담보로 현금 빌려 세금·의결권 희석 피하는 전략...10년간 연평균 12% 성장
미국이 전체 시장의 30% 차지...이제는 10만달러 자산 보유 고객까지 확산

주식을 팔지 않고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생활비나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이른바 'Buy, Borrow and Die' 전략이 전 세계적으로 5조달러가 넘는 거대한 금융시장으로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입수한 Deloitte 조사에 따르면 세계 주요 민간은행과 금융기관 57곳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주식과 채권 등을 담보로 제공하는 증권담보대출 시장 규모는 약 5조4,000억달러로 추산됐다.

미국 뉴욕 증권 거래소
(뉴욕 증권거래소. 자료화면)

과거에는 억만장자와 초고액자산가들이 주로 이용하던 금융기법이었지만 최근에는 자산규모가 훨씬 작은 부유층과 일반 투자자들에게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Buy, Borrow and Die'란

'Buy, Borrow and Die'는 미국 부유층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자산관리 전략이다.

먼저 주식이나 기업지분 등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자산을 보유한다. 자금이 필요할 때는 해당 자산을 매각하는 대신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는다.

주식을 팔지 않기 때문에 매각에 따른 자본이득세를 당장 부담하지 않아도 되고, 창업자의 경우 기업지분과 의결권을 유지할 수 있다.

초고액자산가들은 이렇게 확보한 현금으로 부동산이나 요트, 다른 기업 또는 각종 고가자산을 구입해왔다.

5조4,000억달러 시장

Deloitte는 현재 증권을 담보로 제공되는 신용한도 규모가 약 5조4,0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담보는 대부분 주식과 채권이지만 펀드와 암호화폐까지 포함된다.

Deloitte에 따르면 이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약 12% 성장했다.

글로벌 금융자산 가격이 상승하고 개인 자산이 금융시장으로 더 많이 유입되면서 대출 가능한 담보가 함께 늘어난 영향이다.

Deloitte Switzerland의 신용사업 책임자인 에릭 구츠윌러(Eric Gutzwiller)는 과거에는 "일반 대중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자산관리 고객을 위한 상품"이었다며 지금은 초고액자산가뿐 아니라 부유층, 더 나아가 일반 개인투자자까지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용 대출은 약 1조6,000억달러 추산

다만 5조4,000억달러가 모두 실제로 빌려 쓰인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수치는 고객들에게 제공된 전체 신용한도를 기준으로 한다.

증권담보대출 고객들은 승인받은 신용한도를 모두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Deloitte는 실제 대출잔액이 약 1조6,000억달러 수준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산했다.

조사에는 일반적인 자산담보대출뿐 아니라 투자규모를 늘리기 위해 증권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마진대출도 포함됐다.

미국이 세계 최대...시장 30% 차지

국가별로는 미국이 가장 큰 시장이다.

Deloitte는 전 세계 증권담보대출 시장의 약 30%가 미국에 집중돼 있다고 분석했다.

전통적으로 프라이빗뱅킹 산업이 발달한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은 합쳐 약 12%를 차지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이러한 대출을 일반적으로 '롬바드 대출(Lombard loan)'이라고 부른다.

담보가 있으니 개인 신용심사도 간단

증권담보대출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출절차가 상대적으로 간단하기 때문이다.

은행이 시장에서 즉시 매각할 수 있는 주식이나 채권을 직접 담보로 확보하기 때문에 일반 신용대출처럼 고객의 소득과 부채, 개인 신용도를 장기간 조사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다.

대출금리와 한도도 담보자산의 시장가치와 유동성을 기준으로 비교적 빠르게 계산할 수 있다.

Deloitte에 따르면 평균 담보인정비율(LTV)은 약 50%다.

예를 들어 100만달러어치 주식을 담보로 맡기면 약 50만달러 정도를 빌릴 수 있다는 의미다.

금리는 기준금리보다 약 1%포인트 높아

평균적인 대출금리는 기준금리에 약 1%포인트를 더하는 수준이라고 Deloitte는 분석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매우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다.

담보가 주식이나 채권처럼 즉시 처분 가능한 금융자산이기 때문에 대출 부실로 인한 손실이 상대적으로 적고, 담보가치가 떨어지면 신속하게 추가 담보를 요구하거나 자산을 매각할 수 있다.

전통적인 스위스계 프라이빗뱅크 등 일부 자산관리회사에서는 이러한 대출사업이 전체 연간 이익의 25~30%를 차지하기도 한다.

은행에는 '거의 순이익' 사업

WSJ는 이 같은 구조를 부자들의 'Buy, Borrow and Die'에 빗대 은행에는 'Lend and Thrive', 즉 돈을 빌려주고 번영하는 사업이라고 표현했다.

은행이 받는 대출수수료와 이자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높은 이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동산담보대출처럼 담보를 처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은 시장에서 즉시 팔 수 있다는 점도 은행 입장에서 매력적이다.

래리 엘리슨·일론 머스크 대표적 이용자

이 전략을 대중적으로 알린 대표적인 억만장자는 Oracle 창업자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과 Tesla·SpaceX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Elon Musk)다.

이들은 자신이 창업한 기업의 주식을 팔지 않고 담보로 제공해 자금을 빌려왔다.

주식을 매각하면 자본이득세가 발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업자의 지분율과 의결권이 낮아질 수 있다.

반면 주식을 계속 보유한 채 대출을 받으면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엘리슨, Warner Bros. 인수 지원 위해 차입 확대

최근 래리 엘리슨은 아들이 추진한 Warner Bros. 적대적 인수를 지원하기 위해 은행 차입을 확대했다.

WSJ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보유한 다른 기업의 주식까지 담보로 제공하면서 대출규모를 늘렸다.

이처럼 초고액자산가들에게 증권담보대출은 단순한 생활비 조달수단이 아니라 대규모 기업인수나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도 활용된다.

고객 신용한도의 45%가 250만달러 이상

여전히 시장의 상당 부분은 고액자산가가 차지하고 있다.

Deloitte에 따르면 고객 신용한도의 약 45%는 한 건당 250만달러 이상이었다.

자산가격 상승으로 초고액자산가들의 보유주식 가치가 크게 늘어난 것도 시장 확대의 주요 원인이다.

주식가격이 오를수록 같은 주식을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10만달러 보유자도 이용

그러나 최근 가장 큰 변화는 이용대상의 확대다.

미국 Charles Schwab은 최소 10만달러의 비은퇴 금융자산을 보유한 고객에게 'Pledged Asset Line'이라는 증권담보대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회사는 10월 중순 이 상품의 성장으로 은행 대출잔액이 3분기에 35% 증가해 723억달러에 달했다고 밝혔다.

Schwab은 3년 전 전 과정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부 고객은 몇 분 안에 대출승인을 받을 수 있다.

"억만장자 사고방식을 누구에게나"

영국 Monument Bank도 내년 초부터 투자포트폴리오를 담보로 하는 대출을 시작할 예정이다.

수십만달러 정도의 금융자산을 가진 투자자에게까지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대출담당 책임자인 자비에 드 포(Xavier De Pauw)는 투자자들이 "억만장자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일반 브로커리지 대출은 금리 더 높아

온라인 증권사와 브로커리지 회사들도 비슷한 상품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다만 이들 업체의 대출금리는 전통적인 프라이빗뱅크보다 높은 경우가 많다.

은행은 고액자산가에게 자산관리와 투자상품, 예금, 대출을 함께 제공하면서 전체 관계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브로커리지는 고객과의 금융관계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 일부 증권사는 실제 대출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별도의 은행과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추가될 수 있다.

암호화폐 담보로 90%까지 대출

증권담보대출이 확대되면서 담보대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Deloitte가 2022년 처음 시장조사를 시작한 이후 일부 은행들은 암호화폐 같은 상대적으로 복잡한 자산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일부 금융기관은 암호화폐 가치의 최대 90%까지 대출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일반적인 주식·채권 담보대출의 평균 LTV 약 50%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대신 가격 떨어지면 즉시 청산

그러나 높은 대출비율이 금융기관이 위험을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담보가격이 떨어질 때 금융기관의 대응은 매우 빠르다.

구츠윌러는 담보가치가 기준 이하로 하락하면 은행들이 "무자비할 정도로 즉시" 청산에 나선다고 설명했다.

증권담보대출의 가장 큰 위험도 바로 이 부분이다.

주식시장 급락하면 강제매각

예를 들어 투자자가 100만달러 상당의 주식을 담보로 50만달러를 빌렸다고 가정할 수 있다.

주가가 크게 하락하면 대출금에 비해 담보가치가 부족해진다.

은행은 추가로 현금을 넣거나 다른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은행은 고객의 동의 없이 담보주식을 시장에서 매각할 수 있다.

주식시장이 급락하는 상황에서는 투자자가 가장 팔고 싶지 않은 시점에 주식이 강제로 처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세금 피하려다 오히려 세금 발생 가능

강제매각이 발생하면 세금문제도 생길 수 있다.

투자자가 세금 발생을 피하기 위해 주식을 팔지 않고 대출을 이용했더라도, 금융기관이 담보주식을 강제로 매각하면 자본이득이 실현돼 세금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 증권당국도 증권담보대출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시장 급락 시 강제매각과 세금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부자들의 금융기법이 대중상품으로

증권담보대출 시장의 확대는 부유층 자산관리 방식이 일반 금융시장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에는 수억달러 또는 수십억달러의 주식을 가진 창업자와 억만장자가 세금을 줄이고 기업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특수한 금융기법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이 온라인 신청과 자동화된 심사를 도입하면서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이제는 금융자산 10만달러 정도를 가진 개인투자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주식을 팔지 않고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5조달러 시장이 보여주는 '자산 기반 경제'

5조4,0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증권담보대출 시장은 자산가격 상승이 금융시장의 새로운 신용창출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가와 채권가격이 상승하면 투자자들의 담보가치가 높아지고,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해진다.

대출받은 돈이 다시 소비나 투자로 흘러가면서 금융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의 경제활동 범위를 더욱 확대한다.

반대로 시장이 급락하면 같은 구조가 빠르게 역전될 수 있다.

담보가치 하락이 추가 담보 요구와 강제매각으로 이어지고, 강제매각이 다시 자산가격을 끌어내리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Buy, Borrow and Die'는 더 이상 일부 억만장자의 비밀스러운 자산관리 전략만이 아니다.

5조달러가 넘는 금융시장으로 성장하면서 이제는 은행과 증권사, 고액자산가뿐 아니라 일반 투자자들까지 참여하는 하나의 거대한 대출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