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역사 Weil Gotshal & Manges 해산 결정...변호사 1,200명 규모
재정은 건전했지만 핵심 파트너 잇단 이탈...Willkie와 합병 협상도 결렬
엔론·리먼 파산 자문한 구조조정 명가, 결국 자신을 위한 구조조정 착수

엔론과 리먼브러더스 같은 미국 기업사의 대표적 파산사건을 맡으며 명성을 쌓았던 월가의 명문 로펌 와일 갓셜 앤 맨지스(Weil, Gotshal & Manges)가 95년 역사를 뒤로하고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불과 지난주 신입 변호사 오리엔테이션에서 고위 파트너들은 회사의 장기적인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9일 뒤인 28일 오후 3시30분, 경영진은 전 직원을 다시 불러 모아 정반대의 소식을 전했다.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발표였다.

"이런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회사를 이끌어온 배리 울프(Barry Wolf)는 전사 화상회의에서 "상당한 파트너 이탈과 그에 따른 매출 감소, 기타 혼란을 고려한 끝에 와일의 질서 있는 해산을 권고할 수밖에 없다는 가슴 아픈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이런 결정을 권고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WSJ가 확인한 회의 영상에 따르면 남아 있던 경영위원회 구성원들도 울프와 함께 화면에 등장했다. 앞으로 파트너 투표를 거쳐 공식적인 해산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다.

1,200명 변호사·20억달러 매출 회사가 5일 만에 붕괴

와일에는 전 세계적으로 약 1,200명의 변호사가 근무했고 연간 매출은 20억달러를 넘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영업을 이어가던 수익성 높은 대형 로펌이었다. 그러나 지난주 말 합병협상이 결렬되고 주요 파트너들이 추가로 회사를 떠나기로 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Weil Gotshal & Manges  뉴욕 오피스 빌딩
( Weil Gotshal & Manges 뉴욕 오피스 빌딩.구글)

WSJ는 합병 실패 이후 불과 5일 만에 회사의 몰락이 완성됐다고 전했다.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난 것과 같다"

로펌 업계가 받은 충격은 상당하다.

와일에서 30년 동안 근무했던 한 은퇴 파트너는 "거의 믿기 어려운 일"이라며 "하지만 뱅크런이 일어났고 결국 은행이 문을 닫아야 했다"고 표현했다.

대형 로펌의 핵심 자산은 건물이나 공장이 아니라 고객을 데리고 다니는 스타 변호사들이다. 주요 파트너가 경쟁사로 이동하면 그 파트너가 담당하던 고객과 매출도 함께 빠져나갈 수 있다.

와일의 붕괴는 최고 수준의 명성과 수익성을 가진 대형 로펌조차 핵심 인력 이탈이 시작되면 불과 몇 주 안에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파산기업 살리던 회사가 자신의 구조조정 맡아

아이러니하게도 와일은 미국 법률시장에서 기업 구조조정과 파산 분야를 사실상 개척한 로펌 가운데 하나였다.

2001년 에너지 대기업 엔론이 무너졌을 때 와일이 파산 자문을 담당했고,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리먼브러더스 사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수십 년 동안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가장 먼저 찾는 로펌이었던 회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해 구조조정 전문가를 고용하고 해산절차를 설계하고 있다.

유대계 변호사들이 세운 95년 역사 명문

와일은 당시 미국의 일부 엘리트 로펌에서 배제됐던 유대계 변호사들이 1931년 설립했다.

회사는 파산과 구조조정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했고 특히 하비 밀러(Harvey Miller)가 대형기업 파산 업무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면서 업계 정상급 로펌으로 올라섰다.

다른 대형 로펌들이 파산 업무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던 시절부터 이 분야에 집중한 것이 와일의 대표적인 경쟁력이 됐다.

지난해에도 파산 사건으로 1억6000만달러 수임료

회사가 일감 부족으로 무너진 것도 아니다.

지난해 와일의 구조조정팀은 자동차부품업체 First Brands 파산사건의 주요 자문을 맡았다. 이 사건만으로 약 1억6000만달러의 법률비용을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될 만큼 대형案件이었다.

인수합병(M&A) 부문 역시 Home Depot와 Sunoco의 대형 거래를 자문하며 활발한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재정적으로도 건전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와일이 파산할 정도로 재정이 악화된 회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WSJ에 따르면 와일은 미국 법률업계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상위 20개 로펌 가운데 하나였다.

아직 고객들에게 받지 않은 미수금과 진행 중인 업무에서 발생할 수익만 10억달러를 훨씬 넘었다.

회사가 돈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향후 수익을 만들어낼 핵심 파트너들이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미래의 사업 기반이 붕괴한 것이다.

대형 로펌 경쟁은 '규모와 스타 변호사' 전쟁

와일의 몰락 배경에는 미국 대형 로펌 업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Kirkland & Ellis, Paul Weiss, Latham & Watkins 등 경쟁사들은 최근 수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다른 로펌의 최고 파트너들을 공격적으로 영입하고 업무 분야와 글로벌 조직을 확대해왔다.

WSJ는 와일이 이런 산업 변화에 충분히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고, 규모 확대와 인재 확보를 둘러싼 내부 갈등까지 겹쳤다고 분석했다.

배리 울프·마이클 아이엘로 연봉 각각 2000만달러 이상

내부 권력구조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울프는 2010년부터 회사를 이끌어왔으며, 핵심 M&A 파트너인 마이클 아이엘로(Michael Aiello)는 약 600명 규모의 기업법무 부문을 지휘했다.

두 사람은 회사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파트너였으며 각각 연간 2000만달러 이상을 벌었다.

울프에게는 최고수익 파트너와 동일한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독특한 제도가 적용돼 있었다.

경쟁사와 합병 추진했지만 실패

두 사람은 약 1년 전부터 세계적인 초대형 로펌들과 경쟁하기 위해 다른 로펌과의 합병 가능성을 비밀리에 검토하기 시작했다.

와일이 특히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텍사스 에너지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휴스턴의 Vinson & Elkins에도 접촉했다.

하지만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차기 대표에 라모나 니 선출

울프가 의무 은퇴연령인 68세에 가까워지자 회사는 후임 선정을 시작했다.

경영진은 보스턴의 사모펀드 전문 파트너 라모나 니(Ramona Nee)를 차기 회장으로 결정했고 올해 3월 그녀가 2027년 1월부터 회사를 이끌 것이라고 발표했다.

니는 사모펀드 등 주요 분야의 변호사를 대거 확충해 Kirkland & Ellis나 Latham & Watkins 같은 초대형 경쟁사와 맞설 수 있도록 회사를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문제는 경쟁사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같은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최고 파트너들 경쟁사로 빠져나가기 시작

올여름부터 와일의 최고수익 파트너들이 본격적으로 경쟁사와 이직 협상을 시작했다.

경영위원회 멤버였던 크리스토퍼 마케라(Christopher Machera)는 Paul Weiss로 옮겼고, 사모펀드 파트너 브라이언 파니스(Brian Parness)는 Simpson Thacher & Bartlett로 이동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충격은 이후 발생했다.

최대 매출 책임자 아이엘로도 Cravath로 이직

와일의 최대 매출원 가운데 하나였던 아이엘로가 오랜 친구였던 울프에게 경쟁사 Cravath, Swaine & Moore로 옮기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혼자 가지 않았다.

핵심 M&A 파트너 5명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다.

아이엘로는 유대교 명절 로쉬 하샤나 직전인 9월 초 이 사실을 울프에게 알렸으며 WSJ에 따르면 두 사람은 그 이후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회사 최대 매출원이 한순간에 사라져

아이엘로의 이탈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와일은 최대 매출 창출 파트너와 핵심 M&A팀을 동시에 잃었다.

곧이어 차기 대표로 내정됐던 니도 경영위원회에 회사를 이끌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부 파트너들은 울프가 니에게 실질적으로 회사를 이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파트너 이탈 보도 역시 니에게 상당한 부담이 됐다고 전했다.

경영위원회 멤버들까지 하나둘 떠나

경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다.

남은 경영진은 회사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고 합병 상대를 찾는 작업을 서둘렀다.

10월 20일 와일은 파트너들에게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한 로펌과 합병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마지막 승부수 Willkie 합병도 역효과

그 상대는 Willkie Farr & Gallagher였다.

그러나 일부 와일 파트너들은 Willkie와의 합병 가능성을 알게 된 뒤 오히려 강하게 반발했다.

추가로 파트너 4명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경영진에 통보했고, 이 가운데 2명은 경영위원회 구성원이었다.

결국 지난 목요일 Willkie와의 합병협상은 결렬됐다.

대체할 다른 합병 상대도 없었다.

합병 결렬 후 단 5일

이 시점부터 회사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여러 대형 업무그룹이 경영진에 집단 이탈 의사를 통보했다.

경영위원회는 주말 내내 회의를 열었고 구조조정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화요일에는 Davis Polk의 최고 파산 전문 변호사를 외부 자문으로 영입했다.

일부 파트너들은 자신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에게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수요일 오후 해산 발표

28일 수요일 오후, 전 직원에게 긴급 회의 참석 통보가 전달됐다.

울프는 뉴욕 미드타운 사무실에서 카메라 앞에 앉았고, 옆에는 차기 대표로 내정됐다가 물러난 니를 포함한 남아 있는 경영위원회 구성원들이 자리했다.

울프는 짧은 연설에서 경영진이 회사 해산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불과 9일 전 신입사원들에게 장기적인 미래를 이야기했던 회사가 사라지는 데는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파산신청 없이 청산

와일은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지 않고 자체적인 해산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고객들에게 아직 받지 않은 법률비용을 회수하고 회사의 각종 채무와 계정을 정리하는 방식이다.

가장 큰 부채 가운데 하나는 뉴욕 센트럴파크 맞은편 General Motors Building에 있는 약 38만 제곱피트 규모의 사무실 임대계약이다.

승진 축하용 샴페인이 '마지막 술'로

해산 발표가 있던 날 뉴욕 사무실에서는 상징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변호사들은 원래 승진이나 대형 거래 성사를 축하하기 위해 보관하던 스카치위스키와 샴페인을 꺼내 종이컵에 따라 마셨다.

그날 밤에는 약 50명의 변호사가 미드타운 루프톱바 Le Jardin에 모였다.

원래는 뉴욕 금융팀 1년차 변호사들을 환영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라지는 회사를 위한 사실상의 마지막 송별회가 됐다.

명문 로펌도 '인재 뱅크런' 앞에서는 무너졌다

와일의 붕괴가 미국 법률업계에 충격을 준 것은 회사가 적자를 내거나 고객을 잃어 자연스럽게 쇠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는 여전히 업계 상위 20위권의 수익성을 유지했고 10억달러가 넘는 미수금과 진행 중 업무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형 파산과 M&A 사건도 계속 맡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수익 파트너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다른 파트너들이 뒤따랐고, 합병 가능성이 흔들리자 또 다른 인력이 빠져나갔다. 결국 회사의 현재 재정상태보다 미래에 누가 고객과 매출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신뢰가 먼저 무너졌다.

엔론과 리먼브러더스를 비롯해 수많은 기업의 위기와 파산을 관리해온 와일이 마지막으로 맡게 된 가장 중요한 구조조정 사건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