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부흥부장관과 59년 재무부장관, 74년 EC 대사, 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등 경제 관료로 동양나일론 회장, 전경련 부회장등 민간 경제의 수장으로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애쓴 송인상 한국 능률협회 명예회장이 금일(22일) 오후 2시 50분 별세했다. 향년 101세.
1914년 강원도 회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나온 후 은행원으로 활동하던 중 1949년 해방된 조국의 재무부 이재국장에 발탁되어 물가와 재정을 안정시키는 일을 맡는다. 건국국채를 발행하고 한일 무역회담을 주도하며, 한국은행 부총재 자격으로 국제통화기금(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한국을 가입시키는 성과를 이룬다. 59년에 재무부 장관이 된 고인은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세우는데 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태가 된다.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7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준수한 외모와 수려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전형적인 멋쟁이 경제관료였던 고인은 한국 태동기의 정계와 경제계의 거두들과 혼맥을 동반한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전 상공부 장관인 이봉서 단암산업회장, 고인이 된 전 신동방 회장 신명수씨, 조석례 효성그룹회장 등 재계의 실력가들을 사위로 두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과 같이 사업을 한 조홍제 효성그룹회장과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있으며 남덕우 전 총리는 자신을 제 2의 송인상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을 정도로 후배 관료들과도 깊은 사귐을 유지했다.
98세가 되던 2012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서 우리 경제 발전 태동기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고 말하며 대통령과의 일화를 적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고 말하면서 '당시 젊은 우리가 좀 더 잘했더라면 그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유산인 중앙청을 당장 헐라고 하자 광화문에 쌍둥이빌딩(현재의 미국대사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지어 대안으로 삼은 일화. 화폐개혁 당시에는 통화량을 조절하자는 본인의 의견과 재산권 침해라는 대통령의 반대가 부딪힌 사연등 본인의 경제 철학과 관련된 이슈들은 한 집안의 가장같은 장남의 삶을 살아야 했던 신생국가 경제수장의 노고가 현재의 대한민국의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고인의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된다. 영결실은 25일 오전 6시 30분이며 장지는 대전 현충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