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의 방향을 전통적인 도덕 교리보다 경제적, 사회적 정의에 맞추었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종했다. 그는 교회 내에서 분열을 불러일으켰고, 성직자 아동 성학대 스캔들과 관련된 사법처리에 대한 실망 속에서 향년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바티칸은 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 올해 초 폐렴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은 뒤 바티칸 시국 내 게스트하우스 숙소로 복귀했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여러 면에서 '최초의 교황'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이자,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었고,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선택한 교황이었다. 그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자발적으로 사임한 후 600여 년 만에 선출된 교황이었다.

베르고글리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과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했다.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격식 없는 생활방식으로 교황직을 수행했으며, 소형차를 타고 다니고, 솔직하고도 간결한 말투로 대중과 소통했다.

그는 정치적인 논평도 서슴지 않았다. 빈부 격차에 항의하는 전 세계 민중운동가들에게 '조직하고', '싸우고', '희망하라'고 촉구했으며, 선진국 정부에는 기후변화와 환경 보호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민자와 난민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규모 이민자 추방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통을 언급하면서도 러시아를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과 NATO가 갈등의 일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과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완화하려 했고, 동성애 사제에 대해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라는 발언으로 리버럴한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과 다른 지역의 보수 주교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컸다. 반면 그는 중남미 주교들이 요구했던 가톨릭 사제 결혼 허용을 수용하지 않아 그들로부터는 실망을 샀다.

성직자 아동 성학대 문제와 관련해 무관용 원칙을 선언했으나, 피해자들은 그가 이 문제 해결에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한 미국 추기경의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전직 교황청 외교관의 폭로는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 기간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로 남았다.

그는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결정권을 가진 추기경을 임명하는 데 있어 전통적인 권력 중심지를 피하고, 로스앤젤레스와 베네치아 등 영향력 있는 대교구는 제쳐 둔 채 통가, 라오스 등 인구가 적은 나라 출신 인사들을 지명했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했을 당시 투표권이 있는 추기경 중 약 3분의 2는 그가 임명한 인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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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 바티칸 웹사이트)

차기 교황이 그의 유산을 계승할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프란치스코의 재위 기간 동안 촉발된 교회 내 긴장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철도노동자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화학을 공부했으며, 밤에는 바에서 문지기로 일했고, 탱고 댄서이기도 했다.

그는 17세 이전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받고, 그 즉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그가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그는 "나는 영혼의 의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 정의에 중점을 둔 예수회에 입회했다. 일본으로 선교를 가고자 했지만, 20세 때 폐렴을 앓고 폐 일부를 절제한 건강 상태로 인해 거절당했다. 그는 1969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973년 36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수장이 되었다.

1976년, 아르헨티나에 군부 독재가 시작되자 그의 역할은 논란이 되었다. 두 명의 예수회 사제가 납치되고 고문당한 사건과 관련해 독재 정권과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은 그가 조용한 외교를 통해 피해자들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성찰하기도 했다. 그는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다고 고백했고, 결국 다른 수도회 동료들의 요청으로 수도권에서 약 400km 떨어진 코르도바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큰 내적 위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1992년, 아르헨티나 대교구장 안토니오 콰라치노 추기경이 그를 교황청에 추천했고, 그는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콰라치노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 되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는 대주교 시절에도 겸손한 생활을 이어갔다. 궁전 대신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았고, 요리를 직접 했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자 교황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되었다. 2013년 베네딕토가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자, 76세였던 베르고글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궁 대신 바티칸 게스트하우스의 간소한 방에서 지냈으며, 포드 포커스를 타고 다녔다. 바티칸의 재정 개혁을 위해 기구를 신설했고, 바티칸 은행 개혁을 추진했으며, 부패 척결을 위한 10명에 대한 재판도 벌였다. 하지만 일부 사건은 여전히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난민과 이민자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2015년에는 기후 위기에 대한 행동을 촉구하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다.

이슬람과의 관계 개선도 노력했다. 무슬림의 발을 씻기는 전통을 행했고, 무슬림 국가를 방문했으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밝혔다. 그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며 주교 임명에 있어 중국 정부에 일부 권한을 양보했다. 그러나 이는 지하교회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불렀다.

'자비'는 그의 교황직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다. 그는 용서를 비판보다 우선시했으며, 재혼한 이혼자의 영성체 허용을 추진했다. 동성 커플과 트랜스젠더를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고, 질병 예방을 위한 피임 사용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며, 동성 커플의 시민결합을 지지하고, 동성애 처벌 법 폐지를 촉구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교리를 모호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독일에서는 여성 사제, 동성 커플 축복, 평신도 권한 확대 등을 논의하는 '시노달 웨이'를 통해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일치성을 이유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2024년 전 세계 주교들이 모인 시노드에서는 진보 성향 가톨릭 신자들이 기대한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실망을 안겼다.

하지만 그의 교황직에 그림자를 드리운 가장 큰 사건은 성직자 아동 성학대였다. 초창기에는 공개적 언급을 피했고, 피해자와 전문가가 참여한 자문위원회의 권고 사항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그는 일부 가해 사제들의 형을 감형시켜,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추진한 무관용 정책에서 후퇴했다.

2018년 칠레의 한 주교가 성학대 은폐에 연루됐다는 의혹에 대해 "중상모략"이라 말해 피해자들의 분노를 샀고, 이후 그는 잘못된 보고를 받았다고 밝히며 해당 주교들의 사임을 수용했다.

같은 해, 바티칸의 전 미국 대사가 워싱턴 대교구장이었던 시어도어 매캐릭 추기경의 성적 비위를 교황이 알고도 묵인했다고 주장하며 사임을 촉구했다.

교황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고, 이는 더 큰 논란을 낳았다. 바티칸은 나중에 매캐릭에 대한 보고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를 추기경직에서 해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계속해서 아동 성학대 사건들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피해자들과 비평가들은 그가 근본적인 개혁이나 투명성을 보장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일부는 그가 말뿐인 대응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교황 재위 말기에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공개 행사에서 휠체어를 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는 무릎 통증, 장 수술, 호흡기 질환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었다. 그는 여러 차례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폐렴 치료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2024년 시노드를 끝으로 일부 보수 진영에서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교황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은 죽을 때까지 봉사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임기 중 자주 "우리는 자비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병든 자들을 위한 야전 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그의 교황직은 교회의 권위와 위상을 과시하기보다는, 주변부에 있는 이들, 소외된 이들, 약자들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선종으로 인해 가톨릭교회는 중대한 분기점에 서게 되었다. 차기 교황이 프란치스코의 진보적 유산을 이어받을지, 아니면 전통주의로 회귀할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가 교황 재위 중 남긴 변화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교회 내에서 논쟁과 변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