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스, 영국, 폴란드, 젤렌스키를 설득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수용하도록 유도... 푸틴은 회담 불참으로 대응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유럽 정상들의 외교전, 푸틴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푸틴 대통령이 제안했던 이스탄불 회담은 그가 아직 우크라이나와의 평화 협상에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7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이번 회담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주장하는 바대로, 푸틴이야말로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임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우크라이나, 유럽, 러시아는 모두 이번 터키 회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 대통령과의 만남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서방 주요 인사들과 회담을 가지며 협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럽 지도자들은 올해 초 백악관에서 트럼프 및 부통령 JD 밴스와 갈등을 겪은 젤렌스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조율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푸틴 대통령. 자료화면)

반면 푸틴의 전략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다. 직접 제안한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3년 만에 처음 열린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직접 평화회담에 자신이 아닌 하급 관리들을 보냈다. 특히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30일 간의 휴전안을 논의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이는 회담을 사실상 중단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회담 직후 몇 시간 뒤, 러시아 드론이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 지역에서 민간 버스를 공격해 9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현지 당국은 이를 민간 교통수단을 겨냥한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푸틴은 여전히 전쟁 초기에 내세운 조건들을 고수하고 있다. 그 조건에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양보, 군사력 축소, 나토 가입 금지 및 나토군의 우크라이나 내 주둔 금지 등이 포함된다.

모스크바는 휴전이 우크라이나군에게 무장 재정비 시간을 줄 뿐이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우크라이나에 더 불리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및 서방 정보기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으며, 협상 전에 추가 영토 확보를 위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 토머스 그레이엄(미국 외교협회)은 "푸틴이 2022년에도 보냈던 것과 동일한 하급 대표단을 이번에도 보낸 것은, 협상에 진지하지 않다는 뜻"이라며, "당시에도 러시아는 군사적 실패를 겪고 있었지만, 이후의 참혹한 패배보다는 상황이 나았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강경한 태도는 트럼프를 짜증나게 할 수 있다. 최근 트럼프는 푸틴의 비타협적인 자세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 바 있으며, 미국 내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트럼프를 설득해 더 강력한 제재와 휴전 압박에 동참시키려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푸틴은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문제의 핵심임을 증명했다"며, "유럽은 이제 평화를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격에 맞설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회담은 프랑스, 독일, 영국, 폴란드가 치밀하게 기획한 외교 전략의 절정이었다. 이들 지도자는 젤렌스키와 사전 통화 및 방문을 통해 그에게 트럼프의 휴전안을 무조건 수용할 것을 조언했고, 그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젤렌스키가 휴전 제안을 수용했다고 통보했다.

이후 이들은 푸틴에게 휴전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의 주요 석유 및 가스 수출에 대한 제재를 경고했다. 유럽 외교관들에 따르면, 메르츠 총리의 등장으로 독일이 대러 제재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 이번 외교 전략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푸틴은 이 움직임에 당황한 듯, 뒤늦게 다시 이스탄불에서의 평화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정작 본인은 불참하고 하급 대표단만 파견함으로써 협상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됐다.

이번 유럽의 전략은 트럼프가 평화 중재에 실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유럽 지도자들에게는 일종의 외교적 반격이었다. 그동안 트럼프는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에 충분히 기여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해왔지만, 이번 조치로 유럽은 평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빈에 위치한 인문과학연구소의 이반 크라스테프 연구원은 "이제 푸틴은 왜 트럼프의 휴전 제안을 거부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젤렌스키와 유럽의 지도자들이 수용한 조건을 푸틴이 거부한 만큼, 그 책임은 이제 명확하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그레이엄은 "애초에 이 회담은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과도 같았다"며 "이제 남은 것은 트럼프가 누가 더 설득력 있는 연기를 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당시 지역 순방 중이었으며, 푸틴이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이스탄불 회담에 동참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터키 기반 싱크탱크 EDAM의 시난 울겐 대표는 "푸틴이 하급 관리만을 파견함으로써 트럼프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이라며, "협상 돌파구는 트럼프와 푸틴 간의 직접 회담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도 러시아 대표단의 급을 문제 삼았다.

젤렌스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언론에 "트럼프는 푸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압박 조치로 새로운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천연가스관 '노르트 스트림 2'의 전면 금지안도 포함된다. 해당 가스관은 2021년 말 완공됐지만, 러시아의 침공 이후 가동되지 않았고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와 민간 다이버들이 일부를 폭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틀랜틱 카운슬의 존 허브스트 전 미 외교관은 "이번 유럽의 움직임은 미국이 대러 제재 강화에 동참하도록 압박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관건은 미국 대통령이 푸틴에게 실질적 압박을 가할 의지가 있는가이다. 특히 러시아의 경제 생명줄인 에너지 수출을 차단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핵심이다.

EDAM의 울겐 대표는 "푸틴에게는 전혀 협상 의지가 없다는 점이 트럼프에게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며, "문제는 트럼프가 그것을 과연 내면화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