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 설계한 안보 강경파... 9·11 이후 미국의 대테러 전략을 주도

딕 체니는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을 보좌했으며,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의 설계자로서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부통령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4일 보도했다.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가족에 따르면 사인은 폐렴과 심장·혈관 질환의 합병증이라고 WSJ가 밝혔다. 

WSJ에 따르면, 권력 레버를 다루는 데 능숙한 안보 강경파였던 체니는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집요하게 옹호한 인물로 회자된다. 많은 미국인이 이라크 전쟁을 전략적·인도주의적 재앙으로 보게 되면서, 전쟁은 대중의 개입 회의론을 키우고 공화당 내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체니는 2009년 퇴임 이후에도 이라크 침공을 계속 옹호했다.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이후 추가 공격을 막아낸 것이 오히려 미국인의 해외 개입에 대한 회의론을 부추겼다고 여러 차례 시사했다.

그는 국제 위협을 어둡게 보는 시각과 개입주의 성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2016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9·11에서 멀어질수록 많은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이 하도록 두자,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며 "하지만 항공권과 박스커터만 가진 19명이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평생 심장 질환에 시달렸던 그는 2012년 심장 이식을 받았다. 이후 맏딸 리즈 체니가 하원 공화당 지도부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체니 자신도 공화당의 안보 노선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남았다.

부통령직을 한때 "시시한 자리(cruddy job)"라고 일축했던 체니는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그 직위를 실질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과거 부통령들이 외교사절 역할이나 태스크포스 운영, 혹은 대통령의 '공격수' 역할을 맡아온 것과 달리, 공화당 전임자 댄 퀘일이 "장례식 참석이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을 때 체니는 다른 의중을 밝혔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체니는 퀘일에게 "나는 대통령과 다른 이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취임 후 그는 '통합행정부(unitary executive)'로 알려진 광범위한 행정권을 강력히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른바 '강화된 심문(enhanced interrogation)'을 정당화하도록 주도했는데, 비평가들은 이를 고문으로 간주했다.

사진 캡션: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영부인 로라 부시, 체니 부통령과 부인 린 체니. The Washington Times/Zuma Press

이라크에서 미군 전사자가 늘고, 그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체니는 전쟁 지지를 유지했다.

부시 대통령 임기 후반 체니의 사무실은 각종 스캔들에 휘말렸고, 비서실장이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그의 영향력은 떨어지는 듯 보였다.

퇴임 후 체니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보수진영의 대표적 비판자로 복귀했다. 이에 오바마는 백악관 기자단 만찬에서 체니가 대통령을 좌지우지했다는 인식을 빗대며 "딕 체니는 내 평생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건, 내 평생 최악의 대통령은 딕 체니라고 생각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60년이 넘는 세월을 학자이자 저자인 부인 린과 함께 보냈다. 둘째 딸 메리와도 각별했다. 메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보수 진영의 비판이 뒤따랐지만, 체니는 2000년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자유는 모든 이를 위한 자유"라며 동성혼에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2016년 공화당 경선에서 체니는 트럼프 당시 후보가 부시 행정부의 대테러 대응을 강하게 비판한 데 반박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된 뒤에는 당의 원로 일부와 달리 그를 지지했고, 렉스 틸러슨 전 엑손모빌 회장이 국무장관으로 발탁되는 데 적극 힘을 보탰다.

2018년 영화 '바이스'(주연 크리스천 베일)는 체니의 경력을 어둡고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체니는 2019년 한 대학에서 "와이오밍대에 다니는 손녀가 가족 중 처음으로 그 영화를 봤다. '어땠니?'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진짜 배드애스(badass)라던데, 멋져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네브래스카주 링컨에서 태어난 체니는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미 농무부 토양보전 담당 공무원이었다. 그는 사냥과 스포츠를 즐겼고, 1959년 고교 졸업 후 예일대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중퇴한 뒤 전력회사 가설공으로 일했다.

그는 1963년 와이오밍대로 돌아갔고, 이듬해 고교 동창 린 앤 빈센트와 결혼했다.

결혼과 곧이어 태어난 자녀들 덕분에 그는 대학원 과정을 밟는 동안 징병 연기를 받았다. 1989년 워싱턴포스트에 "나는 60년대에 군 복무보다 우선하는 다른 우선순위가 있었다"고 말했다.

1969년 체니는 학계를 떠나 공화당의 윌리엄 스타이거 하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도널드 럼스펠드의 보호를 받으며 커리어를 쌓았다. 럼스펠드는 경제기회국(OEO) 국장에 이어 닉슨 백악관 선임보좌관으로 옮겼고, 체니도 동행해 '럼스펠드의 그림자'로 불릴 만큼 밀착했다.

1974년 닉슨 사임 후 제럴드 포드는 럼스펠드를 인수위원장에 임명했고, 이어 국방장관으로 발탁했다. 이때 체니는 34세 나이에 백악관 비서실장이 됐다.

체니는 권위적 겉치레를 멀리했다. 10년 된 폭스바겐을 타고 출근했고, 저자세로 지내며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제임스 베이커 등 다른 공화당 실력자들과의 관계를 다졌다.

1976년 포드의 패배로 백악관을 떠난 뒤, 체니는 1978년 와이오밍의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선거 중 첫 심장마비를 겪고도 당선됐다. 그는 초선임에도 하원 지도부에 빠르게 진입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의 국방 증강을 의회에서 뒷받침했고, 미국보수연합(ACU)으로부터 90%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부통령 시절 벌어질 향후 논쟁을 예고하듯, 그는 전쟁권한법과 CIA 개혁 등 행정부 권한을 제한하는 1970년대 개혁에 반대했다. 1988년 재선(그해 관상동맥우회로술 시행) 이후 그는 공화당 원내총 whip에 올랐다.

그러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당선 직후 상원이 첫 지명을 거부하자, 체니는 국방장관으로 발탁되며 하원 지도부를 떠났다. 그는 필리핀 쿠데타 위기,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축출 작전을 지휘했고, 무엇보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맞선 걸프전에서 미 주도의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백악관과 의회에서처럼, 그는 저자세이되 단호한 리더십으로 호평을 받았고, 초기에는 예산 절감에도 성공했다.

1992년 부시의 패배 후 체니는 미국기업연구소(AEI)로 옮겼다. 1996년 대선 출마를 잠시 저울질했으나, 결국 석유 시추 장비 공급업체 거인으로 성장한 할리버튼의 CEO가 됐다. 그는 1998년 드레서 인더스트리 인수로 발생한 석면 관련 손실 등 일부 경영 결정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할리버튼을 이끄는 동안 그는 큰 부를 쌓았고,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97년 그는 '신미국안보프로젝트(PNAC)' 창립을 도왔다. 이 단체는 신흥 민주국과의 긴밀한 동맹, 더 높은 국방비, 이라크 정권 교체 등 보다 적극적인 미국의 대외 역할을 주장했는데, 이는 이후 부시 행정부 정책의 핵심 원칙이 됐다.

그는 조지 W. 부시의 러닝메이트를 물색하는 위원회를 이끈 끝에 스스로를 낙점했다. 이는 국내외 경험이 부족했던 텍사스 주지사에게 중량감을 보탠 결정으로 평가됐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선거가 끝난 직후, 체니는 백악관에서 일종의 비서실장 역할에 비견되는 리더십을 보였고, 럼스펠드는 국방장관으로 복귀했다. 포드 행정부가 재연되는 듯한 구도였다.

2001년 초 정치적 긴장이 팽배한 가운데, 체니는 에너지정책 수립을 위해 업계 경영진과 비공개 회의를 가진 일로 즉각적인 논란에 휩싸였다.

9·11 테러 당시 대통령이 이동 중이었던 상황에서 그는 백악관에서 지휘를 맡는 비상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끌려 지하 지휘소로 대피했다고 회고했다. 납치된 항공기 중 하나가 백악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우려 속에서, 그는 지하 지휘소에서 의회 대피를 지시했고, 대통령과 의회 지도부는 미공개 장소로 이동했다.

체니는 2009년 연설에서 "그 이후로 내가 9·11 이후 달라졌다는 추측을 가끔 들었다"며 "그렇다고 하진 않겠다. 다만 백악관 지하벙커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정교하고 파괴적인 공격을 지켜본 경험은 책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의 회고는 더 비판적이었다. 조지 H. W. 부시는 전기 인터뷰에서 아들이 이끈 행정부에서 체니가 "자기 제국을 구축했고" 자신이 알던 체니와 "매우 강경하고 많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2004년 재선 이후 체니는 발레리 플레임 윌슨 사건-전쟁 비판자의 남편을 둔 CIA 요원의 신원이 유출된 사건-에 점점 더 깊이 얽혔다. 그의 비서실장 스쿠터 리비는 위증 및 사법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체니는 회고록에서 조지 W. 부시에게 리비의 사면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썼다. "조지 부시는 대통령으로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도 리비 사면이 그중 하나였기를 바란다." 리비는 2018년 트럼프에 의해 사면됐다.

한편 이라크 전쟁은 그가 예견한 것과는 달리 수렁에 가까워졌다. 국방부 집계에 따르면 2003년 3월부터 2010년 8월 전투 종료 선언까지 '이라크의 자유' 작전에서 미군 4,400명 이상이 전사했다.

2005년 이라크전 당시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는 딕 체니 부통령
(2005년 이라크전 당시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는 딕 체니 부통령. Press Pool )

2006년 사냥 중 발사한 산탄이 동행 변호사 해리 위팅턴을 맞히는 사고를 낸 뒤, 체니의 터프가이 이미지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2007년 백악관 기자단 만찬에서 부시는 "레임덕은 아니다...물론 체니가 내 다리에 총을 쏘지 않는 한"이라고 농담했다.

그래도 체니는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2009년 폭스 인터뷰에서 이란 핵시설에 대한 군사행동 문제와 관련해 "아마도 동료들 중 군사행동을 가장 강하게 지지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ABC와의 2010년 인터뷰에서는 백악관 내부의 정책 논쟁에서 "이긴 것도, 진 것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가 이룬 성과 중 하나는 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바꿔놓은 일이었다.

체니는 자신을 '스타워즈'의 악당들에 비유하는 농담도 즐겼다. 트럭에는 다스 베이더 트레일러 히치 커버를 달았고, 2015년 플로리다 연설에서는 '제국의 행진'에 맞춰 무대에 올랐다.

사진 캡션: 2011년 '더 투나잇 쇼' 대기실에서 다스 베이더 복장을 한 체니. Paul Drinkwater/NBCUniversal/Getty Images

그는 2004년 USA 투데이 인터뷰에서 "나는 구석진 곳의 악랄한 천재냐? 아무도 못 본다던데?"라며 "사실 그렇게 일하는 게 꽤 괜찮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