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재로 레바논과 이스라엘 정부가 합의한 휴전 구상이 발표됐지만, 정작 핵심 당사자인 헤즈볼라(Hezbollah)가 이를 거부하면서 레바논 전선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4일에도 남부 레바논 공습과 지상작전을 이어가겠다고 밝혔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라고 맞섰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은 3일 워싱턴 회담 이후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휴전 이행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 휴전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가 공격을 완전히 중단하고, 레바논 남부 국경 인근 지역에서 전투원들을 철수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헤즈볼라 "레바논 국민 일부 말살하는 로드맵"
헤즈볼라 지도자 나임 카셈(Naim Qassem)은 워싱턴에서 발표된 휴전 구상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이번 협상을 "수치스러운 협상"이라고 규정하며, 미국이 발표한 구상이 "레바논 국민 일부를 말살하고 나머지를 예속시키려는 로드맵"이라고 주장했다.
카셈은 "점령이 존재하는 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휴전이 성립되려면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은 현재 남부 레바논 일부 지역에 자체적으로 설정한 안보지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북부 이스라엘을 헤즈볼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카셈은 북부 이스라엘의 마을들도 레바논 남부 마을들이 안전하지 않은 한 안전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 마을들이 불안하고, 폭격당하고, 파괴되고, 우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한" 이스라엘 북부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당분간 작전 계속"... 철수 거부
이스라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카츠(Israel Katz) 국방장관은 4일 "이스라엘은 당분간 사격과 지상작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서 "테러 인프라를 해체하는 작전"을 이어갈 것이며,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영토와 공동체를 겨냥한 공격에 대응해 베이루트도 타격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군도 남부 레바논 주민들에게 경고를 발령하고, 헤즈볼라 시설을 계속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레바논 안보 소식통들은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에서 여러 차례 공습을 가했다고 전했다. 레바논 국영 뉴스통신은 소흐모르(Sohmor) 마을 공습으로 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특히 최근 점령한 보퍼트성(Beaufort Castle) 일대 등 남부 안보지대에 병력을 계속 주둔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카츠 장관은 해당 지역에 이스라엘군이 남아 있을 것이며, 주민들의 복귀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휴전안, 헤즈볼라 철수와 레바논군 통제 요구
미 국무부가 발표한 공동성명은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레바논군이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시범 구역'을 신속히 조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구역에서는 헤즈볼라를 포함한 모든 비국가 무장세력이 배제돼야 한다.
휴전안의 핵심은 이스라엘과의 국경에서 리타니강(Litani River) 사이, 즉 남부 레바논 핵심 지역에서 헤즈볼라 전투원들을 철수시키고, 레바논군이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2006년 이후 여러 국제 합의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돼온 요구이지만, 헤즈볼라는 사실상 이를 무장해제 요구로 받아들이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레바논 정부는 보퍼트성 주변 지역을 하나의 시범 구역으로 설정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바논군은 2024년 11월 휴전 합의 이후 남부에 배치됐고, 올해 1월 국경과 리타니강 사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헤즈볼라의 군사적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레바논 대통령 "마지막 기회"... 헤즈볼라 동의가 관건
조셉 아운(Joseph Aoun) 레바논 대통령은 워싱턴 휴전 구상을 "포괄적이고 영구적인 휴전을 확보할 마지막 기회"라고 평가했다. 그는 모든 당사자가 승인할 경우 휴전이 하루 안에 발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헤즈볼라의 동의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아운 대통령과 나와프 살람(Nawaf Salam) 총리는 지난 1년 동안 헤즈볼라의 평화적 무장해제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레바논 내부 정치의 가장 민감한 쟁점이다. 아운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인이고 살람 총리는 수니파 무슬림인 반면, 헤즈볼라는 레바논 시아파 사회의 핵심 무장·정치 세력이다.
헤즈볼라가 배제된 채 레바논 정부가 이스라엘과 휴전안에 동의한 것은 레바논 국가권력과 헤즈볼라 사이의 긴장을 더욱 키울 수 있다. 헤즈볼라는 자신이 협상 당사자가 아니며, 이스라엘군 철수 없는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란도 "이스라엘 철수가 최소 요구"
헤즈볼라를 1982년 창설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도 이스라엘 철수를 최소 조건으로 제시했다. 쿠드스군 사령관은 "저항의 최소 요구"는 이스라엘이 전쟁 전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레바논 전선은 미국·이란 간 지역 분쟁 해법과도 맞물려 있다. 테헤란은 어떤 포괄적 합의에서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 중단이 포함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헤즈볼라의 휴전안 거부는 단순히 레바논 내부 문제를 넘어, 미국과 이란의 협상에도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휴전안 비판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휴전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극우 성향의 이타마르 벤그비르(Itamar Ben-Gvir) 국가안보장관은 이번 휴전 구상을 "중대한 실수"라고 비판하며, 내각 표결을 요구했다.
벤그비르는 헤즈볼라가 리타니강 남쪽에서 전투원들을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레바논군도 헤즈볼라를 강제로 이행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 역시 미국에 양보해 이스라엘의 주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정치적 반대파와 일부 동맹 세력으로부터 받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휴전 논의와 별개로 군사작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헤즈볼라가 공격을 중단하더라도 이스라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남부 레바논이나 베이루트를 타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120만 명 피란... 유엔 평화유지군도 사망
전쟁의 인도주의적 피해도 커지고 있다. 레바논 당국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으로 약 120만 명이 집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수십만 명은 남부 레바논 주민이다. 이들 대부분은 시아파 무슬림이다.
유엔 레바논평화유지군(UNIFIL)은 4일 평화유지군 1명이 전날 밤 남동부 마르자윤(Marjayoun) 인근 진지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입은 부상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이는 레바논 전선이 민간인뿐 아니라 국제 평화유지 병력에도 직접적인 위험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휴전 발표에도 전쟁은 계속
이번 워싱턴 휴전안은 형식적으로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정부의 합의로 발표됐지만, 실제 전장의 핵심 행위자인 헤즈볼라가 거부하면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시 남부 레바논 철수를 거부하고 군사작전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만큼, 즉각적인 충돌 중단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결국 이번 휴전안은 세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휴전을 원하지만 헤즈볼라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휴전에 동의하면서도 남부 레바논 주둔과 공습 권한을 유지하려 하며, 이란은 레바논 전선을 미국·이란 협상의 핵심 조건으로 연결하고 있다.
워싱턴 발표는 중동 확전을 막기 위한 외교적 시도였지만, 헤즈볼라의 거부와 이스라엘의 공습 지속으로 인해 휴전 구상은 출발부터 흔들리고 있다. 레바논 전쟁은 이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국경 충돌을 넘어, 미국·이란 협상과 레바논 내부 권력구조, 이스라엘 국내 정치가 뒤엉킨 복합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