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행정부가 39개국 출신 이민자들의 망명, 노동허가, 영주권, 시민권 신청 심사를 사실상 중단한 정책을 위법하다고 판결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5일 보도했다.
법원은 해당 정책이 의회의 입법과 이민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은 사람들을 국적만을 이유로 장기간 법적 불확실성에 묶어뒀다고 판단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존 맥코넬(John McConnell) 연방지방법원장은 5일 미 시민권이민서비스국(USCIS)이 채택한 일련의 정책을 무효화했다. 맥코넬 판사는 이 정책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의 여러 국가 출신 이민자들을 "기한 없는 법적 림보"에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이민자 지원단체와 노동조합들이 지난 3월 USCIS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낸 소송에서 나온 것이다.
원고 측을 대리한 진보 성향 법률단체 데모크라시 포워드(Democracy Forward)의 스카이 페리먼(Skye Perryman) 대표는 "연방정부는 합법적 이민 경로를 차단하거나 출신 국가를 이유로 사람들을 차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망명·노동허가·영주권·시민권 심사 보류
문제가 된 정책은 39개국 출신 신청자들의 이민 혜택 심사를 보류하는 내용이었다. 대상에는 망명 신청, 노동허가, 영주권, 시민권 신청 등이 포함됐다.
맥코넬 판사는 신청자들이 의회가 만든 법적 절차와 USCIS가 규정으로 정한 절차를 따랐음에도, USCIS가 이들의 신청을 몇 달 동안 심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민자들이 잘못해서 심사가 멈춘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어난 나라"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USCIS가 이런 심사 보류 정책을 채택할 법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봤다. 또한 정책 결정 과정에 이민자에 대한 적대적 정서가 영향을 미쳤고, 이는 행정기관이 고려해서는 안 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맥코넬 판사는 "법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돼야 한다"며 USCIS가 이민법뿐 아니라 행정기관의 행동을 규율하는 행정법도 위반했다고 밝혔다.
주방위군 피격 사건 이후 강화된 이민정책
이 정책은 지난해 11월 워싱턴 D.C.에서 주방위군 2명이 총격을 받은 사건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 단속을 대폭 강화하는 과정에서 도입됐다. 검찰은 해당 사건을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 라흐마눌라 라칸왈(Rahmanullah Lakanwal)이 저질렀다고 보고 있으며, 라칸왈은 혐의를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 시스템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제3세계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영구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후 행정부는 전면 또는 부분적 입국금지 대상 국가를 39개국으로 확대했다.
전면 입국금지 대상에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아이티, 소말리아, 베네수엘라, 시리아 등이 포함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같은 제한 조치를 심사 강화와 국가안보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법원은 국가안보 명분만으로 합법적 절차를 밟고 있는 신청자들의 심사를 무기한 중단할 수는 없다고 봤다.
"출생 국가만으로 삶이 멈췄다"
이번 판결에서 맥코넬 판사는 USCIS 정책이 "수많은 개인의 삶을 멈춰 세웠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법이 정한 절차를 따랐고, 서류를 제출했으며, 심사 결과를 기다릴 권리가 있었지만, 행정기관이 국적을 이유로 결정을 미뤘다는 것이다.
망명 신청자는 심사가 지연되면 신분 안정성을 얻지 못하고, 노동허가가 지연되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다. 영주권이나 시민권 신청자 역시 가족, 취업, 주거, 이동의 안정성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이미 미국 내에서 생활 기반을 마련한 이민자들에게 장기 심사 보류는 실질적인 처벌처럼 작용할 수 있다.
AP통신도 이번 판결이 39개국 출신 이민자들의 망명, 노동허가, 영주권, 시민권 신청에 대한 최종 결정을 막아온 정책을 뒤집은 것이라고 전했다. 법원은 이 정책이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행정조치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민단체·노조의 승리
이번 소송은 이민자 지원단체와 노동조합들의 연합이 제기했다. 이들은 USCIS의 심사 보류가 사실상 합법 이민 경로를 닫아버렸고, 출신 국가를 이유로 신청자들을 차별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판결은 연방정부가 특정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법적 이민 절차를 멈출 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데모크라시 포워드는 이번 판결을 "기본 원칙의 재확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단체는 연방정부가 이민법을 집행할 권한은 있지만, 의회가 만든 법적 절차를 임의로 중단하거나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적 정책을 시행할 권한은 없다고 강조했다.
DHS는 즉각 논평 없어
로이터에 따르면 국토안보부(DHS)는 판결 직후 논평 요청에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다만 월스트리트저널은 국토안보부 법률 책임자가 이번 판결을 이념적으로 편향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해당 정책이 국가안보와 신원검증 강화를 위한 조치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가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 주방위군 피격 사건 이후, 특정 국가 출신 이민자에 대한 심사 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법원은 행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제시하더라도, 구체적 법적 근거 없이 광범위한 심사 보류를 시행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향후 트럼프 행정부의 다른 이민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상원 이민단속 예산 통과와 같은 날 나온 판결
이번 판결은 상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단속 강화를 지원하는 대규모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과 같은 날 나왔다. 미 상원은 ICE와 국경순찰대에 700억 달러를 투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강경 이민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예산 조치다.
따라서 이날은 이민정책을 둘러싼 미국 정치와 사법의 충돌이 동시에 드러난 날이 됐다. 의회에서는 공화당 주도로 이민단속 예산이 확대됐고, 법원에서는 행정부가 특정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합법 절차를 중단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트럼프 이민정책에 또 하나의 법적 제동
이번 판결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이민정책에 대한 또 하나의 법적 제동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들어 입국금지, 망명 제한, 신속 추방, 출생시민권 제한 등 광범위한 이민정책 변화를 추진해왔다. 일부 정책은 하급심에서 제동이 걸렸고, 일부는 연방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행정부가 국가안보와 이민통제를 명분으로 어느 정도까지 합법 이민 절차를 중단할 수 있느냐다. 법원은 그 한계를 분명히 그었다. 이민 심사를 강화할 수는 있어도, 특정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청을 무기한 보류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판결 이후 행정부가 항소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39개국 출신 이민자들의 망명, 노동허가, 영주권, 시민권 신청 심사를 막아온 USCIS 정책은 중대한 법적 타격을 입게 됐다.
이번 판결은 미국 이민정책 논쟁의 중심이 단순한 국경 단속을 넘어, 합법적 절차를 밟는 이민자들의 권리와 행정부 권한의 한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