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유권자들이 고액 보수를 받는 최고경영진을 둔 대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는 주민발의안을 사실상 부결했다. 기업 단체와 기술업계 인사들은 이 세금안이 샌프란시스코의 경제 회복을 방해할 수 있다고 반대해왔고, 이번 결과는 이들에게 승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선거관리국 집계에 따르면 주민발의안 D, 이른바 "과다 보수 CEO 법안(Overpaid CEO Act)"은 반대 53.6%, 찬성 46.4%로 부결됐다. 법안 통과에는 단순 과반이 필요했지만, 남은 표를 감안해도 통과 가능성이 사라진 것으로 평가됐다.

기존 CEO 보수비율세 확대안

발의안 D는 샌프란시스코가 이미 시행 중인 "과다 보수 임원 총수입세(Overpaid Executive Gross Receipts Tax)"를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이 세금은 최고위 임원의 보수가 노동자 중간값의 100배를 넘는 일부 대기업에 추가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현행 제도는 최고위 임원 보수와 샌프란시스코 내 직원들의 중간 보수를 비교해 세금 적용 여부를 판단한다. 발의안 D는 이 기준을 바꿔, 해당 기업의 전체 노동자 보수와 최고위 임원 보수를 비교하도록 했다. 또 영향을 받는 기업들의 세율도 크게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상업용 건물이 밀집한 다운타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자료화면)

샌프란시스코 재무관실은 현행 과다 보수 임원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에 부과되는 총수입세의 추가 세금이며, 최고위 관리자 보수가 샌프란시스코 기반 직원들의 중간 보수보다 100배 이상 많을 때 적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간 2억5천만~3억 달러 세수 예상

시 당국은 발의안 D가 통과될 경우 연간 2억5,000만~3억 달러의 추가 세수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지지자들은 이 재원이 시 공공서비스를 유지하고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과 진보 진영은 연방정부 지원 축소와 시 재정 압박 속에서 대기업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최고경영진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보수 격차가 지나치게 커졌으며, 샌프란시스코가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 측은 이 세금이 샌프란시스코의 기업환경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맞섰다. 특히 도심 회복과 기업 유치가 중요한 시점에 대기업을 겨냥한 세금을 크게 높이면,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거나 신규 투자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니얼 루리 시장도 반대

대니얼 루리(Daniel Lurie) 샌프란시스코 시장도 발의안 D에 반대했다. 루리 시장은 중도 성향 민주당원으로, 공공안전과 경제 회복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반대 측에는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와 기업 단체들도 참여했다.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발의안 D 반대 캠페인에 50만 달러를 기부했다. 폭스비즈니스는 기술업계 주요 인사들이 이 세금안이 샌프란시스코의 AI 투자 붐과 기업 유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반대 진영이 660만 달러를 모금해 캠페인을 벌였고, 이는 찬성 측 모금액의 두 배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시 경제분석도 "일자리 감소 가능성"

샌프란시스코 시 경제분석도 발의안 D를 둘러싼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샌프란시스코 컨트롤러실 분석에 따르면 발의안 D가 통과될 경우 향후 20년 동안 평균적으로 약 950개의 일자리가 줄고, 시 국내총생산은 2억600만 달러 감소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분석은 기업들이 세금 부담에 대응해 고용을 줄이거나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반대 측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발의안 D가 세수 확보보다 경제적 손실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대기업과 고액 임원에게 공정한 부담을 요구하는 조치라며, 시 재정과 공공서비스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샌프란시스코 유권자, 중도적 방향으로 이동

이번 결과는 최근 샌프란시스코 유권자들이 경제와 치안, 행정 문제에서 보다 중도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흐름과 맞물린다.

샌프란시스코 유권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진보 성향의 체사 부딘(Chesa Boudin) 전 지방검사를 소환했고, 교육위원 3명을 해임했으며, 경제 회복과 공공안전을 강조한 루리 시장을 선출했다.

이번 발의안 D 부결도 같은 흐름 속에서 해석된다. 샌프란시스코 유권자들이 소득 불평등 문제에는 공감하더라도, 기업 유출과 경제 회복 지연을 초래할 수 있는 세금 인상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AI 투자 붐 속 기업환경 논쟁

샌프란시스코는 최근 인공지능(AI) 기업과 투자자금 유입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픈AI(OpenAI)를 비롯한 AI 기업들의 성장과 베이 지역 기술 생태계의 회복은 샌프란시스코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높은 세금, 치안 문제, 사무실 공실, 생활비 부담, 기업 이탈은 여전히 샌프란시스코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발의안 D 논쟁은 이 두 흐름이 충돌한 사례다. 한쪽에서는 AI 붐과 기업 유치를 통해 도시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고 보고, 다른 쪽에서는 대기업과 고액 임원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권자들은 이번 투표에서 후자보다 전자에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기업계 "성장과 일자리 우선" 신호로 해석

발의안 D의 부결은 샌프란시스코 기업계와 기술업계에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기업 옹호론자들은 이번 결과가 유권자들이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도시 경쟁력 회복을 우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다만 노동계와 진보 진영은 시 재정 압박과 공공서비스 축소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예산 부족과 도심 회복, 공공안전, 주거비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이번 주민투표 결과는 샌프란시스코가 경제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기업 친화적 노선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소득 불평등 완화를 위해 어떤 방식의 세제를 추진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고액 임원 보수 격차를 겨냥한 세금 인상보다, 기업 이탈을 막고 경제 회복을 우선하는 선택을 했다. 이는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진보적 세금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태도가 이전보다 신중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