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군사작전 중단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지 수 시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 대형 유조선들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했다. 전쟁으로 차질을 빚었던 걸프 지역 원유 수송이 부분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양해각서가 전쟁의 영구적 종료를 명시한 레바논에서는 이스라엘군의 공습이 계속됐다. 이스라엘도 레바논 주둔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어, 미·이란 합의가 중동 전선 전체의 종전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사우디 국적 초대형 유조선 3척은 18일 약 6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마수드 페제시키안(Masoud Pezeshkian) 이란 대통령이 전쟁 종식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처음 확인된 대규모 원유 수송이다.
사우디 초대형 유조선 3척 통과
이번에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모두 사우디 국적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으로, 전체 적재량은 약 600만 배럴에 달했다.
그동안 일부 선박들은 이란의 공격과 나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끄고 위치를 숨긴 채 운항했다. 그러나 합의 이후에는 여러 선박이 다시 위치신호를 켜고 호르무즈해협 통과를 준비하는 모습이 확인됐다.
해운업계는 전쟁 이전 수준으로 통항량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안전한 항로를 확인하고 기뢰를 제거해야 하며, 해상보험과 선박 운항사들의 위험 판단도 정상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우디 유조선의 통과는 양해각서가 실제 원유 운송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브렌트유 78달러 아래로 하락
호르무즈해협 재개방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국제유가도 추가 하락했다.
국제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 선물가격은 이날 약 2% 떨어져 배럴당 78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이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호르무즈해협은 평상시 세계 원유 소비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는 핵심 해상 통로다. 이란이 해협을 사실상 봉쇄한 이후 세계 에너지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고, 유가는 배럴당 120달러를 웃돌기도 했다.
미·이란 양해각서는 호르무즈해협을 즉시 개방하고, 미국이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를 해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완전한 통항 정상화까지는 최대 30일이 걸릴 수 있다. 이란은 이 기간 기뢰와 군사·기술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선박 통행량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최종 합의까지 60일 협상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프랑스에서 미국과 이란 간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문서에 서명하면서 합의는 당초 예상보다 이틀 일찍 발효됐다.
이번 양해각서는 미국과 이란이 최대 60일 동안 최종 합의를 협상하도록 규정한다.
양측은 협상 기간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이란은 핵 프로그램의 현 상태를 유지하며, 미국은 새로운 제재를 부과하거나 역내 병력을 추가 배치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와 석유제품의 수출에 필요한 제재 면제를 제공하고, 이란의 동결자산 사용 문제도 협상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향후 협상에서 이란 핵 프로그램과 농축우라늄 처리, 무장단체 지원, 제재 해제 방식 등을 구체화한다는 입장이다.
문건에 레바논 전쟁 '영구 종료' 명시
이번 양해각서는 미국과 이란의 직접적인 군사작전뿐 아니라 레바논 전쟁의 영구적 종료도 명시했다.
공개된 문안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 양측 동맹세력은 모든 전선에서 군사작전을 즉시 중단하고, 향후 서로에 대한 전쟁이나 무력 사용을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레바논 전쟁의 "영구적 종료"와 레바논의 영토 보전 및 주권 보장을 별도로 언급했다.
이는 레바논 문제도 평화합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이란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란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과의 합의가 자국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레바논 군사작전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스라엘은 협상에서 제외
그러나 레바논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번 미·이란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난 3월 레바논을 침공한 뒤 남부 지역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란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공격한 헤즈볼라 무장세력을 제거하고, 북부 국경에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합의를 체결하더라도 레바논에서 철수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스라엘군은 18일 자국 병력이 점령한 레바논 남부 지역을 이전보다 확대해 표시한 새 지도를 공개했다. 이스라엘은 해당 지역을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미국과 레바논 주둔 협상
이스라엘 당국자들은 레바논 주둔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와 가까운 이스라엘 고위 당국자는 미국과의 협상이 "완강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이스라엘 당국자는 협상 결과가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강제로 밀어붙일지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외교 지원 축소 등 이스라엘에 실질적인 불이익을 경고할 경우에만 이스라엘이 철군이나 작전 축소를 검토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 이스라엘의 레바논 작전 공개 비판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스라엘의 레바논 군사작전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 대원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건물 전체를 불필요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과 이란의 양해각서에 레바논 전쟁 종료가 명시된 것도 트럼프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작전 중단을 압박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오랫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를 과시해왔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는 등 이스라엘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했다.
올해 이란과의 전쟁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동 군사작전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레바논 문제를 둘러싼 견해차가 커지면서 미·이스라엘 관계는 수십 년 만의 중대한 갈등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합의 서명 뒤에도 레바논 공습
트럼프 대통령이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에도 레바논에서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됐다.
레바논 국영 NNA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18일 남부 크파르테브니트와 제브딘을 공습해 3명이 숨졌다.
베이루트와 남부 교외 상공에서는 이스라엘 무인기가 낮게 비행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로이터 기자들은 전했다.
양해각서가 처음 발표된 이번 주 초에는 레바논 내 교전이 한동안 감소했다. 그러나 이후 며칠 동안 공습과 전투가 다시 증가했고, 공식 서명 이후에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는 미·이란 양해각서가 발효됐더라도 이스라엘이 이를 즉각적인 군사작전 중단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레바논 주민 "우리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레바논에서는 전쟁으로 100만 명 넘는 주민이 피란한 것으로 추산된다.
남부 나바티예에서 베이루트로 피란한 무함마드 도그만(Mohammed Doghman)은 "이란과 미국의 문제는 끝났다고 하지만 레바논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아니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최종적인 답을 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남부 티레 인근 크라일리예에서는 일부 피란민이 파괴된 집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왔다. 주민들의 집은 콘크리트 잔해로 변했고, 일부 주민들은 현장을 가자지구에 비유했다.
티레 주민 압델카림 알다히(Abdelkarim al-Dahi)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충돌을 만화 '톰과 제리'에 비유하며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내부서도 미·이란 합의 비판
미국과 이란의 양해각서는 이스라엘 정치권 전반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란이 핵 프로그램과 역내 무장세력 지원 능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미국이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제재 완화를 제공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조만간 두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해야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지원을 잃거나,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레바논 작전을 끝내거나 축소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제시한 전쟁 목표 대부분 미달 논란
트럼프 대통령은 약 4개월 전 이란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란 핵 프로그램 파괴와 주변국 공격 능력 제거, 무장단체 지원 차단을 목표로 내세웠다.
또 이란 국민이 강경 지도부를 축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으며, 한때 이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양해각서 서명 시점까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해체되거나 정권이 교체된 것은 아니다.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을 통제하며 미국과 협상에 나섰고, 원유 수출과 금융거래에 대한 제재 면제도 확보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 60일간의 협상에서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강력한 최종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란이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폭격을 재개할 수 있다며 군사적 압박 수단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비판론 "이란, 전쟁 전보다 협상력 높아져"
트럼프 대통령의 비판자들은 이란이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강한 협상 위치에 섰다고 주장한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을 견뎌냈고, 호르무즈해협 통제력을 이용해 세계 에너지 시장에 충격을 줬다. 최종 합의 전에도 원유 수출과 금융거래를 위한 제재 면제를 확보했다.
공화당 내 일부 강경파도 이란이 핵·미사일 능력과 역내 무장세력 지원을 명확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원유 수송 정상화와 군사작전 중단이 세계 경제의 심각한 침체를 막았으며, 향후 협상을 통해 더 포괄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해협 재개방은 진전... 레바논이 첫 시험대
사우디 대형 유조선들의 호르무즈해협 통과는 미·이란 양해각서의 첫 가시적 성과다. 유가도 하락하면서 세계 에너지 공급 정상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는 합의문에 명시된 군사작전 종료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공습을 계속하고 있으며, 점령지역에서 철수할 뜻도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실제로 철군과 공격 중단을 강제할 수 있는지가 이번 합의의 첫 번째 중대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호르무즈해협의 완전한 정상화와 레바논 전쟁 중단, 이란 핵 문제, 제재 해제 방식이 앞으로 60일간의 최종 협상 성패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