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에게 인도적 사유로 미국에 체류해온 이민자 수십만 명의 법적 보호를 종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대법원은 25일 보수 성향 대법관 6명과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의 의견으로 갈린 판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아이티 출신 이민자들의 임시보호신분(TPS)을 종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아이티 출신 약 35만 명과 시리아 출신 약 6,000명에 대한 TPS 혜택을 즉시 종료할 수 있게 됐다.

아프가니스탄과 네팔, 남수단, 베네수엘라 등 다른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TPS도 추가로 종료될 가능성이 커졌다.

대법원 "대통령 발언, 명백한 인종적 표현 아냐"

TPS 수혜자 측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이티 출신 이민자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바탕으로 보호조치를 종료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아이티를 불결하고 질병이 만연한 국가로 묘사하고, 아이티 이민자들이 미국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다수의견을 작성한 새뮤얼 얼리토(Samuel Alito) 대법관은 대통령이나 국토안보부 장관의 발언 가운데 명백하게 인종적인 표현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얼리토 대법관은 해당 발언들이 인종과 무관한 정책적 근거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연방대법원
(연방 대법원. 자료화면)

그는 법원이 TPS와 관련한 행정부의 결정을 심사할 수 있는 권한도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다.

TPS, 전쟁·재난 국가 출신에게 임시 체류 허용

TPS는 무력충돌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등으로 귀국이 위험한 국가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에 일정 기간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미 의회는 1990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TPS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직접 제공하는 제도는 아니지만, 지정된 국가 출신 이민자들은 보호기간 동안 추방되지 않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다시 취임했을 당시 17개국 출신 약 130만 명이 TPS를 통해 미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가운데 13개국에 대한 TPS 지정을 종료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행정부는 이전 정부들이 '임시' 보호조치를 반복적으로 연장해 사실상 영구적인 체류 허가로 변질시켰다고 주장했다.

국토안보부 "TPS의 T는 임시라는 뜻"

제임스 퍼시벌(James Percival) 미 국토안보부 법률고문은 판결 후 소셜미디어 엑스에 "TPS의 T는 임시를 뜻한다"고 밝혔다.

그는 많은 TPS 지정이 사실상의 사면으로 변했다며 이번 판결을 법치와 상식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국토안보부는 TPS 종료를 결정하면서 해당 국가들의 상황이 개선됐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아이티를 포함한 일부 해당 국가에 대해 납치와 범죄, 테러, 시민 불안 등을 이유로 미국인들에게 여행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진보 대법관 3명 반대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은 다수의견에 반대했다.

엘리나 케이건(Elena Kagan)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아이티와 아이티 출신 이민자들에 대해 해온 여러 비하 발언을 인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아이티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고 주장하고, 아이티 출신들이 "아마도 에이즈에 걸렸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케이건 대법관은 이러한 발언이 혐오스럽고 인종적 의미를 담고 있어 다수의견이 판결문에 직접 옮기기를 피했다고 비판했다.

TPS 수혜자 측은 행정부가 보호조치를 종료하는 과정에서 법적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며, 인종·민족적 소수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해왔다.

아이티 출신 약 35만 명 보호 종료 가능

이번 판결로 아이티 출신 약 35만 명은 다른 체류자격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를 잃고 추방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부 TPS 수혜자는 망명이나 다른 형태의 이민 보호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망명은 TPS보다 적용 대상과 요건이 좁고 개별적으로 박해 위험을 입증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TPS 종료로 상당수 수혜자가 단기간 안에 추방 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티 이민자들을 대리한 제프 피폴리(Geoff Pipoly)와 앤디 타우버(Andy Tauber) 변호사는 이번 결정이 안전한 삶을 찾기 위해 고국을 떠난 아이티 TPS 수혜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밝혔다.

TPS 수혜자, 정기적으로 신원조회 받아

TPS 자격을 얻고 유지하려면 이민자들은 정기적으로 상세한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민자 권리단체들은 TPS 수혜자들이 지역사회에서 법을 지키며 생활하고 경제활동에도 기여해왔다고 설명한다.

일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배우자나 자녀를 두고 있다.

TPS가 종료되면 한 가족 안에서도 부모는 추방 대상이 되고 자녀는 미국 시민으로 남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지난해에도 베네수엘라인 보호 종료 허용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TPS 축소 정책을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법원은 지난해 두 차례 긴급명령을 통해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TPS를 행정부가 신속하게 종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대법원은 구체적인 판단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TPS 종료를 둘러싼 광범위한 법적 쟁점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지도 않았다.

이번 판결에서는 행정부 결정에 대한 사법부의 심사 권한과 인종적 편견 주장 등 보다 근본적인 쟁점을 다뤘다.

국경 망명 신청 제한도 허용

대법원은 이날 별도의 이민 판결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미국·멕시코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 이민자들에게 정식 망명 신청 기회를 주지 않고 즉시 돌려보내는 이른바 '미터링(metering)' 정책을 허용했다.

미 연방법은 고국에서 박해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 미국에서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망명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대통령이 국경에서 입국자를 즉시 돌려보내고 이들이 해당 법에 따른 망명 절차를 바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도 보수 대법관 6명과 진보 대법관 3명의 의견으로 갈렸다.

트럼프 이민 단속 권한 확대

두 판결을 종합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TPS 수혜자들의 법적 보호를 종료하는 동시에 국경에 도착한 망명 신청자들의 입국도 보다 신속하게 차단할 수 있게 됐다.

TPS 판결은 이미 미국에서 생활하는 이민자들의 체류자격에 영향을 미친다.

국경 망명 판결은 앞으로 미국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보호 신청 기회를 제한한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광범위한 이민 단속과 추방정책의 법적 수단이 한층 강화됐다.

출생시민권 폐지 소송은 아직 심리 중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이민정책 가운데 불법체류 이민자의 미국 출생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정책은 아직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미국 수정헌법 제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체류자의 자녀에게 출생시민권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이 이 정책까지 허용할 경우 미국 이민제도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가 크게 바뀔 수 있다.

대법원은 통상 7월 초 시작되는 여름 휴회를 앞두고 남은 주요 사건들의 판결을 발표하고 있다.

다음 판결 발표일은 오는 29일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