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수송량 전쟁 전의 76%까지 회복...하지만 휘발유·디젤 등 정제유는 전체의 11%에 불과
중동 정유시설 잇단 미사일·드론 공격으로 생산 차질..."원유가 아니라 정제능력이 문제"
美 디젤 전국 평균 갤런당 6.53달러 사상 최고...캘리포니아는 8.44달러

트럼프, 농업용 면세 '적색 디젤' 고속도로 사용 한시 허용...G7도 비축유·디젤 1억배럴 방출
정유시설 완전 복구에는 시간...시장 정상화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 

이란전쟁 이후 사실상 마비됐던 호르무즈 해협의 원유 수송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세계 에너지시장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재 부족한 것은 원유 그 자체가 아니라 디젤을 비롯한 정제유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 3일 기준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간 원유 물동량의 7일 평균은 하루 1,030만배럴로 전쟁 이전 정상수준의 약 76%까지 회복됐다.

호르무즈 해협
(호르무즈 해협. 자료화면)

하지만 휘발유와 디젤 등 정제된 석유제품은 하루 약 130만배럴에 불과했다. 전체 석유 수송량의 약 11% 수준이다.

전쟁 이전에는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석유 화물 가운데 정제유 비중이 20%를 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즉 원유를 실은 대형 유조선은 다시 해협을 지나기 시작했지만 소비자와 기업이 실제로 사용하는 디젤과 휘발유, 항공유는 여전히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원유가 아니라 디젤이 부족하다

휴스턴의 에너지 컨설팅업체 리포 오일 어소시에이츠(Lipow Oil Associates)의 앤디 리포(Andy Lipow) 대표는 WSJ에 현재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비자는 원유를 직접 사지 않는다.

소비자가 실제로 구매하고 사용하는 것은 휘발유와 항공유, 디젤이다.

문제는 중동에서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대형 정유시설 여러 곳이 손상되면서 원유를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연료로 바꾸는 능력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최근 로이터도 중동 원유 수출량은 전쟁 이전 수준에 근접하거나 일부 기간에는 이를 넘어섰지만 정유시설 파괴와 운송 병목 때문에 디젤 등 석유제품 가격은 여전히 매우 높은 상태라고 분석했다.

美 디젤 갤런당 6.53달러 사상 최고

정제유 부족의 충격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 가운데 하나가 미국이다.

WSJ에 따르면 지난달 말 미국 전국 평균 디젤 가격은 갤런당 6.53달러까지 올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캘리포니아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높은 연료세와 제한된 지역 정유능력, 공급부족이 겹치면서 평균 디젤 가격이 갤런당 8.44달러까지 상승했다.

디젤 가격 상승은 단순히 트럭 운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 식료품과 전자제품, 건축자재, 온라인 주문 상품 등 거의 모든 물품은 공급망의 어느 단계에서 트럭으로 운송된다.

따라서 디젤 가격 상승은 운송비를 통해 식료품과 생활용품 가격으로 전가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간선거를 앞두고 디젤 가격을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게 보고 있는 이유다.

원유는 돌아왔는데 왜 가격이 안 내려가나

일반적으로 원유공급이 늘면 에너지가격은 내려간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원유를 배럴 단위로 공급하는 것과 이를 실제 소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유는 정유공장에서 가솔린과 디젤, 항공유, 나프타 등으로 분리·가공돼야 한다.

정유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원유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완제품 연료는 부족할 수 있다.

현재 중동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우디·쿠웨이트·UAE·이라크 정유시설 차질

WSJ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이라크 등 중동 주요 산유국의 정유시설들이 전쟁 과정에서 미사일 공격이나 드론 공격, 기타 가동중단 사태를 겪었다.

원유 생산은 상당 부분 정상화되거나 우회수출이 가능해졌지만 이를 디젤과 휘발유로 가공하는 정유능력은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공격이 지속되면서 세계 디젤 공급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로이터는 현재 에너지시장의 위기가 초기의 '원유 부족'에서 '정제유와 물류 부족'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호르무즈 통과 원유 하루 1,030만배럴

시장조사업체 Kpler가 WSJ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간 원유 화물은 최근 7일 평균 하루 1,030만배럴까지 증가했다.

이는 전쟁 이전 기준의 약 76%다.

최근 집계 범위를 중동 전체로 넓히면 회복속도는 더욱 빠르다.

로이터에 따르면 9월 말 일부 기간에는 중동의 원유수출량이 전쟁 이전 하루 약 1,800만배럴을 넘어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출 회복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같은 양의 원유가 시장에 나오더라도 디젤 공급이 비슷한 속도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정제유는 하루 130만배럴뿐

WSJ에 따르면 최근 호르무즈를 통과한 휘발유와 디젤 등 석유제품은 하루 약 130만배럴이었다.

전체 석유 화물 가운데 약 11%에 불과하다.

전쟁 이전에는 20% 이상이었다.

이는 해협 통과량을 단순히 총배럴 수로만 보면 에너지시장 상황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원유 1천만배럴과 디젤 1천만배럴은 경제에 미치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원유는 정유공장에 들어가야 하지만 디젤은 트럭과 산업장비, 발전기 등에 바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세계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후자다.

미국 정유업계 "원유보다 디젤 수송선을 보호해야"

이 때문에 미국 에너지업계에서는 미 해군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호위하는 선박의 우선순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WSJ에 따르면 일부 미국 석유업계 경영진은 원유를 운반하는 유조선보다 디젤과 휘발유를 운반하는 석유제품 운반선을 미 해군이 우선적으로 호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현재 미군이 주로 호위한 선박은 VLCC(Very Large Crude Carrier)로 불리는 초대형 원유운반선이다.

VLCC 한 척은 약 200만배럴의 원유를 실을 수 있다.

반면 디젤이나 휘발유를 운반하는 최대급 석유제품 운반선의 적재량은 그 절반 정도다.

원유를 한 번에 대량으로 운반하기에는 VLCC가 효율적이지만 현재 시장에서 가장 부족하고 가격이 비싼 것은 정제유다.

디젤 가격, 원유 가격의 거의 두 배

WSJ은 현재 디젤이 원유보다 거의 두 배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정유시설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원유가 부족하다면 원유 가격과 정제유 가격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원유보다 디젤 가격이 훨씬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6일 셰브론(Chevron)의 마이크 워스(Mike Wirth) 최고경영자도 세계 에너지시장에서 원유보다 휘발유와 디젤 등 정제제품의 공급 부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시아로 원유 도착해도 디젤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

현재 호르무즈를 빠져나오는 원유 상당량은 앞으로 약 한 달 후 중국과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정유시설에 도착한다.

이론적으로는 이곳에서 원유를 정제해 다시 국제시장에 디젤을 공급할 수 있다.

하지만 WSJ은 이 역시 단기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일본, 한국 등이 현재 자국 내 연료공급 안정성을 우선하면서 정제제품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수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동에서 원유가 아시아로 넘어가더라도 이를 다시 디젤로 만들어 미국이나 유럽시장으로 보내는 양은 제한적일 수 있다.

미국이 다시 '세계의 정유공장' 역할

이 때문에 미국은 세계적으로 디젤이 부족해질 때마다 반복돼온 상황에 다시 놓이고 있다.

미국 정유업체들이 부족한 국제시장에 디젤을 공급하는 주요 수출자가 되는 것이다.

유럽은 특히 러시아산 석유제품 의존도를 낮춘 이후 미국산 디젤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그런데 미국 국내 디젤가격까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오르자 트럼프 행정부는 한때 디젤 수출제한까지 검토했다.

유럽에는 미국이 디젤 수출을 제한하기 전에 전략비축분을 풀라는 압박도 가했다.

그러나 G7 국가들이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합의하면서 트럼프는 수출금지를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G7, 원유·디젤 1억배럴 방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등 G7은 지난 2일 비상 비축유에서 원유와 디젤을 합쳐 1억배럴을 시장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방출은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초기 20일 동안 상당한 양의 디젤을 시장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1억배럴 가운데 정확히 얼마가 원유이고 얼마가 디젤인지, 어느 국가가 어느 정도를 부담할지는 아직 모두 확정되지 않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10월14~15일 회의에서 세부 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다.

트럼프, 농업용 '빨간 디젤'까지 고속도로에 푼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 디젤 가격을 낮추기 위한 별도의 행정명령도 발표했다.

핵심은 이른바 '적색 디젤(red-dyed diesel)'이다.

미국에서는 농업용 트랙터나 건설장비 등 도로 밖에서 사용하는 차량과 장비용 디젤에는 연방 도로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일반 도로용 디젤과 구별하기 위해 붉은 염료를 넣기 때문에 '빨간 디젤'이라고 불린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올해 말까지 이 연료를 일반 고속도로 차량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를 통해 연방 디젤세 갤런당 24.4센트의 납부를 연말까지 유예한다.

"오래 필요하지 않기를 바란다"

트럼프는 네브래스카 유세장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농업 등에 사용되는 면세 디젤의 고속도로 사용제한을 일시적으로 없애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 조치가 "오랫동안 필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 역시 현재 디젤 부족이 장기적인 정상상태가 아니라 전쟁으로 발생한 비상상황이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유시설 복구 상황을 보면 단기간에 완전히 정상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사우디 원유수출은 급증

반면 원유 쪽에서는 상당한 회복이 나타나고 있다.

Kpler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9월 하루 약 700만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8월의 약 두 배다.

사우디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경로뿐 아니라 홍해 쪽 수출시설까지 동시에 활용하면서 물량을 늘렸다.

최근 로이터 자료에서도 중동 전체 원유수출은 일부 기간 전쟁 이전 수준을 넘어섰으며 사우디의 수출 회복이 이를 주도했다.

Kpler의 맷 스미스(Matt Smith)는 사우디가 현재의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고 판단했거나, 다시 긴장이 높아지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원유를 내보내려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란이 호르무즈 통제력을 잃었나"

원유수출 회복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이란이 전쟁 초기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세계 에너지 공급을 압박했던 전략이 약해지고 있을 가능성이다.

최근 중동 석유수출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면서 시장에서는 미국과 걸프 산유국들이 호르무즈 해협의 원유 흐름을 상당 부분 다시 통제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기 시작했다.

로이터는 9월 말 중동 원유수출이 하루 1,830만배럴 수준까지 회복됐으며 일부 날짜에는 전쟁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란 공격은 다시 증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란은 최근 호르무즈 해협 인근 선박을 겨냥한 공격을 다시 늘리고 있다.

10월 첫째 주에만 최소 7척의 유조선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따라서 최근의 수송량 회복이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Kpler의 선박추적 자료는 실제 선박의 움직임을 며칠 늦게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 공격이 앞으로 수송량 감소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원유가 있어도 운송비가 너무 비싸다

또 하나의 문제는 물류비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높은 보험료와 운송료를 부담한다.

일부 중동발 아시아행 대형 유조선 운임은 하루 120만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배럴 자체는 공급되고 있지만 배를 움직이는 비용이 급등한 것이다.

결국 원유 생산량만 정상화돼도 소비자가격이 과거 수준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아니다.

정유와 해운, 보험, 항만 등 공급망 전체가 정상화돼야 한다.

전쟁의 에너지 위기가 '원유 부족'에서 '정유 부족'으로 이동

전쟁 초기 세계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차단돼 원유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문제가 변했다.

원유 자체는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유시설이 파괴됐고 선박보험과 운송비는 급등했으며 디젤·휘발유 생산능력이 부족하다.

에너지 위기의 중심이 원유공급에서 정제와 물류로 이동한 셈이다.

세계 최대 에너지 트레이더 가운데 하나인 비톨(Vitol)의 러셀 하디(Russell Hardy) 최고경영자도 최근 하루 약 1,200만배럴의 원유와 200만배럴의 정제제품이 중동에서 나오고 있지만 정제유 시장의 긴축은 겨울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정상화는 2027년까지 걸릴 수도

WSJ이 인용한 업계 분석가들은 현재의 수출 회복세가 유지되더라도 세계 연료시장이 완전히 정상화되는 시점은 2027년 상당 기간이 지난 뒤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쟁으로 사라진 수억배럴의 석유 재고를 다시 채워야 한다.

파괴된 유전과 정유시설도 수리해야 한다.

중동뿐 아니라 러시아 정유시설의 손상도 해결돼야 한다.

여기에 각국이 낮아진 전략비축유를 다시 채우기 시작하면 추가적인 수요가 생길 수 있다.

결국 소비자에게 중요한 것은 '원유 몇 배럴'이 아니다

이번 호르무즈 수송 회복은 에너지시장을 볼 때 원유 가격과 원유 생산량만으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유는 경제가 직접 사용하는 완제품이 아니다.

공장에서 정제돼 휘발유와 디젤, 항공유가 돼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유시설 하나가 파괴되면 수십만배럴의 원유가 있어도 사용할 연료를 만들 수 없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원유가 다시 흐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트럭 운전자가 필요한 것은 원유가 아니라 디젤이다.

항공사가 필요한 것은 항공유이고, 소비자가 주유소에서 원하는 것은 휘발유다.

그래서 원유 수송량이 전쟁 이전 수준에 접근하고 있는데도 미국 디젤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호르무즈가 열려도 에너지 위기는 끝난 게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적색 디젤의 고속도로 사용까지 허용했고, G7은 비축유와 디젤 1억배럴을 방출하기로 했다.

최근 원유 수송 회복으로 국제유가에는 일부 하락압력도 나타나고 있다. 6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유제품 시장에서는 아직 같은 수준의 정상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셰브론의 마이크 워스 CEO는 6일 세계 석유와 정제유의 여유 공급능력이 오히려 줄고 있어 현재 에너지 시스템이 전쟁 초반보다 더 취약해졌다고 경고했다.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원유 수송 회복은 에너지 위기 해결의 중요한 첫 단계다.

하지만 세계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원유를 실은 VLCC가 아니라 디젤과 휘발유를 실은 제품운반선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정유시설이 다시 가동되고 정제유 공급망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호르무즈에서 원유가 아무리 많이 흘러나와도 소비자가 체감하는 에너지 위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