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우드맨 밀러는 1999년 4월 20일 죽음을 확신하며 컬럼바인 고등학교 도서실 탁자 아래 숨어있었다. 상급반 학생인 딜란 클레볼드와 에릭 해리스는 그녀의 친구들을 쏘기 시작했고, 밀러는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무장괴한이 그의 총을 장전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그녀는 학교에서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나가면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당시의 총격에 대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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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또 다른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인터뷰를 했다. 미디어는 계속해서 전화를 해댔고, 그녀는 어떤 이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를 공유할 책임을 느꼈고, 특히나 사람들이 듣고 있었기에 그러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긴급함이 있었어요. 나는 그러한 일이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길 바래요. 절대로요."

콜로라도 리틀톤에서 클레볼드와 해리스는 그 날 자살하기 전에 12 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교사에게 총을 쏘았다. 총기 난사의 동기는 왕따와 종교적인 이유를 포함하지만, 분명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격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거의 10년 후인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 학살이라는 제목이 나왔다.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 캠퍼스에서 조승희라는 학생은 27명의 학생들과 다섯명의 교수진을 학살하고 그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기록은 조승희가 정신병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건은 총기 통제 법, 정신 보건 자원과 학교 보안에 대한 국가 논쟁을 촉발시켰다. 컬럼바인에서 있었던 1999년 총격이나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2007년의 대학살은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생존자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 사건들은 다양한 학생들의 단체와 가족들을 학교 안전 옹호자로 만들었다. 총격 사건 이후, 그들은 안전한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청소년, 관리자, 법 집행과 정치인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사람들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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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 사건이 일어나기 전 밀러는 자신의 삶을 모두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는 컬럼바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총을 가지고  학교로 걸어들어왔을 때, 16세의 밀러는 도서실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다른 두 친구와 함께 탁자 아래 숨어 그녀는 7분 반 동안 그 둘이 10명의 사람을 죽이는 총성을 들었다. 그때  그들이 그녀의 탁자 앞에 다다랐을 때 총알이 떨어졌다. 밀러와 그녀의 친구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는 길에 시체를 밟으며 뛰어나갔다.

수 년 동안, 컬럼바인은 그녀를 소진시켰다. 그녀는 종종 폭력적인 꿈을 꾸었다. 이런 가운데 인터뷰를 해주는 것이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인터뷰가 항상 단지 사건에 관한 것만은 아니에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하는것 만이 다가 아니죠.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

밀러는 회복되었고, 그녀는 '레이첼의 도전'처럼 컬럼바인 총격에서 살해된 첫 번째 학생의 비영리 단체의 대변인으로 일했다. 그녀는 정식 직원으로 10년 동안 대변인으로 일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안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학교들을 찾아다녔다. 밀러는 이제 32세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모든 이들을 친절하게 대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어떠한 것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말로 내 삶을 바꿨어요.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선생이에요. 그냥 다소 달라 보일 뿐이지요."

글: 줄리아 글럼(IBTimes기자)
번역: 한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