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 ·1920∼2005년)와 생전에 30년 넘게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온 미국인 유부녀 학자의 관계는 우정이었을까? 우정 이상의 관계였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미국인 유부녀 학자와 32년간 서신을 주고 받고 집을 방문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BBC 방송은 15일(현지시간)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이날 저녁 BBC1 채널에서 방송되는 다큐멘터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비밀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같이 보도했다. BBC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유부녀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해 다큐멘터리로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BBC에 따르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가톨릭 교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성인으로 추대된, 그리고 9년 전에 사망한 요한 바오로 2세와 우정을 나눈 주인공은 폴란드 태생의 미국인 여성 철학자인 안나-테레사 티미에니에츠카(Anna-Teresa Tymieniecka·1923∼2014년)다.

둘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치하를 견뎠다. 티미에니에츠카는 이후 해외로 유학을 떠났고, 철학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저명한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헨드릭 호우트해커(Hendrik Houthakker)와 결혼해 세 자녀까지 두었다.

둘의 인연은 교황이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la) 추기경이던 시절인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티미에니에츠카는 교황의 저서 <행동하는 사람(Acting person)>을 영어로 번역 출간하는 작업을 위해 폴란드로 건너갔다.

이후 4년 동안 두 사람은 서신 교환과 방문을 통해 공동 출간작업을 하며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사이가 됐다.

BBC는 둘의 관계가 더 깊었고, 더 복잡했으며, 앞서 알려졌던 것보다 더 오랫 동안 지속됐다고 표현했다.
또 1970년대 폴란드에서 성직자와 여성 사이의 모든 관계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바르샤바의 공산주의 정권은 가톨릭을 적으로 여겼고, 비밀경찰들은 지속적으로 가톨릭 지도자들을 감시했었다.

마렉 라소타(Marek Lasota) 박사는 공산주의 시절의 자료들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비밀경찰이 보이타와 추기경에 대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화도청 장치를 설치해 그의 전화를 도청했고,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검열하기도 했다.

따라서 편지에서 실제로 친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크라쿠푸에서 보낸 편지가 아니라 1974년 로마에서 보낸 것이었다.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1974년 가을 가톨릭 추기경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한 달 이상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BBC는 이와 관련 1973년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서신 교환이 처음에는 공식적인 내용 위주였지만, 우정이 깊어갈수록 친밀한 내용으로 변해갔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4년 티미에니에츠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전에 받은 편지 4통이 "철학적인 코드로 쓰여 있기는 했지만, 너무나 의미 있고 개인적으로 뜻깊은" 내용이어서 재차 읽었다고 적었다. 아울러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에게 편지로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주제들이 많다고도 했다. 그는 티미에니에츠카의 편지 여러 개를 함께 로마로 가져가 읽고 이처럼 친밀함을 듬뿍 담은 답신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BBC는 한쪽의 서신(요한 바오로 2세가 여성에게 보낸 서신)만 볼 수 있어서 양측이 어떤 내용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1975년 여름에 둘의 관계가 여전히 초기 단계였을 때, 티미에니에츠카가 보이티와 추기경에게 (서신 등을 통해)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6년 편지에서는 티미에니에츠카를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까지 묘사했다. 그러면서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이처럼 그녀를 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서신만 주고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추기경 시절 티미에니에츠카를 스키나 캠핑 여행에 종종 초대했고, 1976년 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티미에니에츠카의 집에 초대받아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머무르기도 했다.

이들은 1977년에도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고, 1978년에는 캠핑 여행을 함께 즐기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이 된 이후 전 세계를 여행했는데 구름 같은 무리들이 몰리면서 록 스타와 같은 인기를 끌었다. 이런 가운데 사적인 삶을 이어가는 것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둘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린 시절 첫 영성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묵상용 스캐풀라(scapular·성스러운 글귀나 그림이 그려진 작은 천 조각에 긴 끈을 연결해 몸에 지니도록 한 성물)를 티미에니에츠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소장품 중 하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0월 편지에서 스캐풀라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이미 지난해에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다'는 말에 대한 답과 그 방법-스캐풀라-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가까울 때나 멀리 있을 때, 모든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BBC는 이밖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티미에니에츠카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둘 사이의 우정을 '신앙의 범주' 안에 두려고 애쓰면서도 때로는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BBC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다수의 여성 친구들을 두었고, 오랫 동안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티미에니에츠카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놓고 씨름하면서 매우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표현했다.

둘 사이의 우정은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교황이 되고 나서도 2005년 선종할 때까지 30년 넘게 이어졌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이 교황이 된 이후에도 티미에니에츠카에게 둘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했다.

티미에니에츠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1990년대에도 꾸준히 그를 문병하고 선물을 보냈으며, 그의 선종 전날에도 방문했다고 BBC는 전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편지들은 티미에니에츠카 사망 후 폴란드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이번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 그녀는 사망 전인 2008년 폴란드 국립도서관에 자신의 편지를 팔았다.

신문은 타미에니에츠카를 엄청난 '호더(Hoarder)'로 표현했는데, 이는 저장 강박증으로도 불리는데, 물건을 벌지 못하고 못아두는 일종의 강박 장애로 집에 온갖 것을 잔뜩 쌓아두는 성향이다. 이로 인해서 요한 바오로 2세와의 편지도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사망 후 숨겨 두었던 엄청난 양의 사진이 발견되기도 했었다.

사진들 중에는 스키 슬로프에 있는 모습, 호숫가에서 캠핑 여행을 즐기면서 반바지를 입은 모습, 개인적인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모습 등이다.

티미에니에츠카는 생전 인터뷰에서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친분에 대해 "애정 어린(mutually affectionate) 관계였다"고 말하면서도 "중년의 성직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느냐"며 우정의 선을 넘지 않았다고 답했다.

티미에니에츠카의 절친한 지인들은 그러나 그가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이성적으로 끌렸던 것은 확실하며, 다만 교황 쪽에서 그런 감정의 깊이를 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텔레그래프는 보도했다.

한편, 텔레그래프는 바티칸은 BBC의 다큐멘터리 내용에 대해 "해당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서 어떤 부정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밀연애 같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